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2018
한번 들으면 각인되는 제목,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공포영화인가 B급감성의 괴랄한 스릴러 영화인가 싶어 포스터를 보면 더 궁금증이 생긴다. 벚꽃이 만개한 거리 등지고 서 있는 소년과 소녀. 역시 로맨스일까?동명의 일본소설이 원작이며 작년 10월 동명 실사로 제작한 영화가 개봉했고 국내에서 꽤나 흥했했다. 특이한 제목 덕에 보고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와디즈 투자에 참여하고 무료관람권을 얻어 어제 보게 되었다.
스포주의
01 필요
'나는 몇 년 안에 죽는다. 나의 췌장은 망가졌다.'
영화 초반 이미 여주인공은 '사쿠라'는 곧 죽게 될 운명임을 고백한다. 여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은 온도차이가 확연하다. 요즘 말로 '인싸'로 대표되는 사쿠라는 친구도 많고 성격도 밝고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히로인. 남자주인공은 잘생긴게 분명한데도 워낙 말수도 없고 책만 읽고 혼자 있는 탓에 완전히 존재감이 없는 아웃사이더. 남주말을 빌려 말하자면 참 '따분한 클래스메이트.'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매일 죽음이 가까워지는 사쿠라의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통통 튀는 성격으로 재밌는 일을 벌이고 마음이 가는 일을 하며 곧 죽는다는 처지와 상관없이 하루를 온전히 쓰며 살아가는 사쿠라. 그래서 혹여나 그 밝은 일상의 빛이 바래질까 주변 사람에게 자기 병을 알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울리고 싶지 않으니깐. 그 하루가 사쿠라에게 너무 중요하니깐
오히려 학교라는 사회에서 죽어있는 건 남자 쪽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미숙하고 골치아프기 때문에 그는 아무하고도 교류하지 않는다. 사람에 무관심하다. 기대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 혼자에 익숙하다. 그럼 골치아프지 않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쿠라와 남자주인공인 가까워질 수 있었던 계기는 사쿠라가 불치병에 걸린 덕분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남주는 병원에서 사쿠라가 떨어뜨린 '공병문고'를 집어들었다. 그렇게 우연히 그녀의 일기장을 보았다.
-너 일기장을 읽었지? 나 곧 죽어.
-그렇구나.
담백하고 AI스러운 남주 말에 사쿠라는 배꼽을 잡고 깔깔 웃는다. 그 순간 남주는 사쿠라에게 특별한 존재로 각인된다. 그래서 그날이후 남주에게 놀자고 적극적으로 들이댄다. 사쿠라는 남주가 필요했다. '남자친구도 아니고 친구라고 하기도 어려운 그'는 사쿠라에게 중요했다.
넌 솔직하면서도 일상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잖아.
나와 함께 있으면서 내 사정을 알면서도 울지 않고 담담히 거리를 두고 일상을 보내줄 수 있는 사람. 나에게 크게 관심도 애정이 없어서 가능한 이 관계가 특별하다.
02 결핍
내장구이를 가장 좋아하는 이상한 여자 사쿠라. 친구도 많으면서 아무 사이도 아닌 자신에게 자꾸만 친한 척 한다. 관심없으니 알아서 살라고 하자 제멋대로 할거라며 계속 일상에 자신을 끌어들인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비오는 날 다른 남자에게 흡씬 두들겨 맞은 남주는 사쿠라에게 화를 내고 만다. 나의 가장 취약한 부분. 타인과의 관계. 상처받아 봉인해놓은 자기방어를 자꾸만 풀어헤치는 사쿠라.
'너는 친구가 필요해. 제대로 말하지 않으니깐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라고.'
사쿠라에게 산다는 건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일' 그건 남주가 가장 두렵고 망설이는 일. 그게 사쿠라가 살아가는 의미.. 그래서 남주에게 사쿠라는 빛이고 동경의 존재다. 거부할 수 없고 자꾸만 끌린다.
사실 사쿠라는 이전부터 남주를 주의깊게 지켜보았다. 자신의 매력과 존재 의미는 다른 사람과 있을 때만 확인될 수 있는 종속적 성격의 것인데 혼자서도 매력을 지니는 남주가 궁금하고 신기하다. 다른 누군가가 없이도 그 사람일 수 있다는 그 독립적 성향이 멋지다. 이렇게 반대 성향의 소년과 소녀는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멋지게 지니고 있는 서로를 동경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03 사랑과 우정사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이 관계. 그 시절 너를 만나 나는 성장했어.
사쿠라는 자꾸만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게 한다. 그런 너라서 다행이고 안심이 되면서도 서운하다.
나 사실은 죽는게 무섭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역시 위로는 없었다.
죽어가는 사쿠라 앞에서 그는 무력하다. 그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없다. 하지만 사쿠라가 걱정된다. 그녀가 알고 싶고 그녀란 사람이 궁금하고 관심이 간다. 사쿠라가 죽는 게 싫다. 이대로 더 일상을 함께 보내고 싶다. 그녀가 사라질까 두렵다.
-죽기 하루 전에 너에게만은 꼭 말할게. 걱정하지마.
그날 사쿠라는 혼자 밤에 눈물을 삼켰다. 세상 누구도 필요하지 않던 한 남자가 살아줬으면 한다는 진심이 담긴 고백. 평범하고 특별할 거 없는 그녀의 인생이 특별해져버렸다. 남주는 사쿠라가 언제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쿠라는 남주가 그녀를 필요하다고 말한 순간 자신이 유일무일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있잖아. 벚꽃은 봄이 오기까지 기다리다 봄이 오면 한 순간 꽃을 피우는 거래. 벚꽃은 피어야할 때를 기다리는 거지.
그 둘 관계에서 우정이니 사랑이니 구분지을 필요도 서로가 서로를 좋아했나 묻는 질문도 의미없다. 네가 살길 바라고 나는 네가 되고 싶고 너는 내게 특별했고 나는 너를 사랑했고 나는 네게 배운대로 사려고 하고 나는 이제 행복해지려고 한다. 그들의 마음은 이 문장 하나로 전해지니깐.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생각이상으로 너무 좋았던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거의 울뻔했는데 역시나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언제 극장에서 울게 될까요? 죽음이 소재지만 절대로 무거운 분위기는 아닌데 통통 튀는 사쿠라 같은 글을 쓰긴 어렵네요. 사쿠라도 남주도 너무나 사랑스럽고 대견한 영화. 오래도록 마음에 남고 몇 번을 다시 보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