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평생 공부하며 살 사람인 줄 알았다. 주변 사람들도 그리 여겼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더라.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한국에 강의조차 개설되지 않은 분야였다. 고등학교때도 크게 받지 않았던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대학에서 받았다. 대학만 가면, 대학만 가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나 큰 오산이었다.
오히려 고등학교때는 쉬웠다. 목표는 명확했다. 수능만 바라보며 일직선으로 걸으면 됐다. 나에게는 수능은 하나의 정복대상, 게임의 목표였다. 목표가 뚜렷한 사냥에, 재미를 잃을 수 있겠는가? 이는 수컷의 본성이다. 경주마처럼 눈가리개를 차고 정면으로 달린다. 필요 없다고 여긴 수업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나에게는, 책도 중요했으니까, 지성도 중요했으니까. 고등학교 3년 내내 교탁 바로 앞에서 왼쪽 자리에 앉았다. 오른쪽에서 왼쪽을 바라보는 것보다, 왼쪽에서 오른쪽을 보는게 편하다는 이유로. 그 칠판을 보기 가장 좋은 자리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 용케도 성적이 좀 나오는 나를, 선생은 용서했다. 용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선생들께도 전했다. 나는, 그런 학생이라고.
하루는 야간 자율학습이 하기 싫었다. 11시 반에 자습을 마치면, 집에 가서 통화를 했다. 전 글에서 이야기한 '쇼코' 중 하나였다. 나는 원하면 자습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를 뒤에서 욕한 친구들도 많다. 새벽 5시 반에 등교하여 하루종일 공부하던 친구들이다. 성인이 되고 고등학교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며 들었는데, 그 친구들은 나를 극도로 증오했다고 한다. 그 친구들은 정말로 아플 때도 자습을 빠질 수 없었다. 다시 돌아가서, 원하면 사전에 이야기하고 자습을 빠질 수 있었으나 나는 그 날 자습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후에 교실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냥 그런 충동이 들었다. 오늘은 자습이 하기 싫다는.
계단을 내려가다, 계단을 올라오는 감독 선생과 마주쳤다. 나는 담임 선생의 허락이 있었다고 했으나 감독 선생은 믿지 않았다. 확인을 위해 담임 선생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전화를 했다. 감독 선생이 옆에 있으니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담임은 왜 전화를 했냐고, "피곤하면 쉬어야지!" 했다. 여러번 있었던 일도 아니다. 나는 내 나름의 규칙 있었다. 자습은 한달에 두번만 빠진다. 그리고 무조건 담임의 허락 후에만 빠진다. 따라서 이는 전적으로 담임의 임기응변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통찰력은 놀랍다.
그렇게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대학생이 되었다. 처음에 이야기했듯,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부담이 덜해야 했던 사람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살아갈까, 어떤 직업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일상을 박탈 당할까 하는 두려움은 내게 없었다. 그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게 목표였다. 하지만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연구결과, 생각은 여과 없이 텍스트로 접할 수 있다. 강연으로도 접할 수 있다. 결국 학교는, 졸업장 이상의 가치가 없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담감이 큰 이들보다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유학의 기회도 있었다. 그래서 영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목표에 도달하자마자 관심이 식었다. 다시 또 비대한 자의식은 고개를 들고, 오만함이 날뛰었다. 나는 못 해서 도망가는게 아니다. 안 하는 것이다. 그 믿음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마지막 과제가 남아있었다. 학점이 엉망인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A+, A+, A+과 함께 등을 돌렸다. 별로 내 지성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건 공부가 아니었다.
그리 살고 있다가 일을 제안 받았다.앉아서 글만 쓰면 되는 일이었다. 마침 흥미도 있는 분야라 수락했다. 1년이 지나고 일을 마쳤다. 이전과 같았다. 결국 대중들 앞에 선보이지 못 한 글은 일기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남에게 내보이지 않는 글만 쓰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인터넷이라는 세계가 있었다. 인터넷에서는 독자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5년째 댓글이 달리는 글도 있다. 연초에 인사드리러 왔다는 댓글을 볼 때마다 놀라곤 한다. 내 글쓰기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계속되었다. 아니, 매체를 가리기는 했다. 내가 원한다하여 실릴 수 없었기에 내 손이 닿는 곳에서만 글쓰기가 계속되었다는게 정직한 설명이다. 그리고 글쓰기에 쏟는 시간은 절정에 이르렀다.
나를 소유의 할아버지처럼 대하는 쇼코들이 있다. 그들은 나를 "보지도 않고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처럼" 여긴다. 당연히 내게 그런 능력은 없다.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하라고 하면, 나는 겪어보시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어느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애꿎게도, 나를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수단들이 구직에서는 강점이었다. 혐오감을 가지고 그만둔 학교가, 오만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부한 영어가, 나를 대변했다. 내 가치는 그것 뿐이었다. 하지만 쇼코들은 그런 무능력자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곤 한다. 능력이라도 있는 양 나를 추켜세워, 오만함은 또 배가 부르다.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쇼코들은, 나에게 소유의 할아버지보다도 더 한 역할을 맡기기도 한다.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내가 그럴 수 있다면, 그러한 합리성을 지녔다면 ,나는 어제처럼 살지 않았다. 5시간 자고 18시간동안 글을 썼다. 다시 5시간을 자고 글을 쓴다. 글쓰기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내 하체는 약해진다. 매일 밤, 생각을 정리할 겸 하는 산책이 그토록 내 육체에 큰 기여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작품 속에서 소유는 꿈이 멀어졌다고 느낀 순간, 꿈이 허상이며 자신을 좀 먹는다는 사실을 안 순간, 그 허상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나에게 글쓰기는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니기에, 허상이 될 수도 없다. 내 꿈은 무엇일까. 통제광인 나는 인류 전체를 통제하고 싶다. 꿈은 이런 것 아닌가? 꿈은 좇을 수 있는게 아니기에 허상이 되지도 않는다. 실은,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인류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인간계는 복잡계이니.
이리도 다른걸 보니 나는 소유가 아니다. 쇼코도 아니다. 소유의 할아버지도 아니다. 그렇게 한꺼풀씩 벗겨나가면 결국 그 곳에는 공허만이 남는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소유로, 쇼코로, 소유의 할아버지로 여겨진다. 반야심경은 아주 심원한 통찰을 지녔다.
내 배설물을 보면 나를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배설물이 탁하다고 한다. 하지만 탁한 배설물을 내보냈으니 나는 오히려 깨끗해진게 아닌가? 소유의 할아버지에게 밝은 일상을 알리는 쇼코도 쇼코이며, 소유에게 뒤틀린 내면을 비추는 쇼코도 쇼코다. 이런 글을 쓰다가도 물을 마시며 계획을 세운다. 오늘은 책을 사고 머리를 자르고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의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이는 내가 아는 과학은 답할 수 없다. 과학이 줄 수 있는 답은 결국,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형이상적인 답변 밖에 할 수 없다. 철학도 다를 바 없다. 현실을 따지면 완전히 미궁으로 빠진다. 밥값도 안 나오는 것에 그리 몰두할 필요가 어딨겠는가. 비디오 게임도 이렇게 미친듯이 하지는 못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글쓰기를 즐긴다. 이제야 답을 알겠다. 내 오만함이, 내 글은 숫자로 결정되는게 아니라고 믿어버린 것이다. 평생을 나를 끌고다닌 오만함이, 나를 고뇌로부터 지켜준다.
북클럽에 계신 여러분들에게는 이틀 연속으로 폐를 끼쳤다. 하지만 형식은 자유라고 하니, 이 또한 감상의 한 형태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