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맛있는 한국 음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인타운이 나름 잘 발달되어 있는 뉴욕에 살지만 순댓국이나 장어구이 같이 한국에서는 의외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들을 맛있게 하는 집을 찾기가 힘들다 아재 입맛.
평양냉면도 그중 하나다. 여름 날씨가 시작되면서 냉면이 당겨 여러 집을 다녀봤지만 제대로 된 육향과 메밀향이 나는 평양냉면은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가격도 세금과 봉사료까지 포함하면 한 그릇당 2만 원은 족히 나온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블로그 등에 올라오는 평양냉면을 사진으로만 보다가 자린고비 황금 같은 글을 찾고야 말았다.
지방에 사시는 어떤 분이 오늘의 유머라는 사이트에 예전에 올린 글인데 우레옥 평양냉면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재료를 사다 집에서 면도 뽑고 육수도 직접 끓여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는 전설 내용이다. 장인 정신을 발휘한 이 분께 무한한 존경심이 우러났고 까짓것 나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도전하는 데 차마 제면기까지 살 수는 없어서 집에서 쫓겨나기 싫어서 면은 마트에서 샀고 글에 적혀있는 대로 육수를 뽑아봤다. 고기 향과 간장 맛이 슴슴하게 나는 게 의외로 괜찮았지만 뭔가 20% 부족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평양냉면 본좌의 비법 레시피라는 글을 찾은 다음 두 글에 나온 레시피를 합친 나만의 방법으로 지난 주말 두 번째 평양냉면에 도전해 봤다.
01. 준비
일단 한인 마트에 가서 양지와 사태살을 적당히 사 왔다. 우레옥 레시피는 쇠고기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고 나오는데 집에서 이렇게 끓이면 감칠맛이 현저히 부족하다. 부족한 맛을 메우기 위해 봉피양 레시피에 나온 대로 대파와 무, 마늘, 그리고 양파를 추가했다. 단맛을 추가하기 위해 한국 배도 사 왔다.
모든 국 요리의 기본이지만 고기를 끓이기 전에 핏물을 빼줘야 한다. 집에 있는 가장 큰 냄비를 꺼내 양지와 사태살을 씻은 다음 칼로 큰 기름덩어리를 땐 후 찬물에 담갔다. 급하면 1시간 정도만 핏물을 빼줘도 되지만 여유가 된다면 중간에 물을 한번 간 다음 총 3시간 정도 핏물을 빼는 것을 권장한다. 이 작업을 제대로 해놓으면 나중에 끓일 때 불순물이 훨씬 덜 나와 국물이 깨끗해진다.
고기의 핏물이 빠지는 동안 다른 재료들을 준비해 놓는다. 국물을 최대한 깔끔하게 내기 위해 다시용 망을 사 왔다. 망 안에 무 1개를 크게 조각내 넣고 다른 망에는 양파 2개를 반으로 쪼개 넣었다. 마늘은 통째로, 대파는 뿌리 부분만 다음은 후 따로 망에 넣었다. 대파 잎 부분은 나중에 또 써야 하니 버리지 말고 잘 챙겨놓자. 마지막으로 배를 반으로 쪼개 망에 같이 넣는다.
02. 육수
냄비에 담긴 물이 끓기 시작하면 일단 핏물을 뺀 고기부터 넣는다. 이미 불순물을 많이 제거했지만 검은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올 것이다. 5분 정도 끓인 다음 물을 모두 다 버린다.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최대한 맑고 누린내가 없는 육수를 만들기 위한 피나는 과정이니 과감히 버려야 한다.
다시 냄비에 찬물을 넣고 불을 올린다. 드디어 육수를 내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냄비에 고기를 넣고 아까 망에 넣어둔 여러 재료들도 함께 넣는다. 이제부터 4시간 동안 재료들을 삶으면서 물이 증발한 만큼 1시간 정도 단위로 물을 첨가해야 한다. 중간중간에 위로 뜨는 이물질 역시 국자로 걸러가면서 끓여야 한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국간장을 좀 넣는다. 간을 맞춘다기보다는 향을 위해 넣는 것이다. 우레옥 스타일로 진하고 색이 어두운 육수를 원하면 간장을 더 많이 넣어야 하고 을지면옥 스타일로 맑은 육수를 원하면 간장을 적게 넣는 게 좋다. 어차피 간은 나중에 완성이 된 다음에 소금으로 할 것이니 간이 맞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끓인 지 2시간 정도가 지나면 야채와 배는 많이 흐물거리기 시작하니 빼서 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총 4시간이 지나면 육수는 얼추 완성이 된다. 고기를 조심스럽게 빼 (푹 익어서 잘못 만지면 으스러질 수도 있다) 도마 위에서 식혀둔다. 식힌 고기는 따로 썰어서 편육으로 준비하면 된다.
말이 냉면 육수지 아직까지는 비주얼이나 향이 갈비탕이다. 게다가 간도 안 했기에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원래는 여기에 동치미 국물을 넣어줘야 하지만 뉴욕에는 동치미 따윈 없기에 (...) 야매로 한인마트에서 산 동치미 냉면 육수를 뜯어 부어준다. 풀무원에서 친절하게 다시다까지 넣었기에 한층 더 식당 냉면 맛이 난다.
레시피에는 설탕을 조금 넣으라고 나오는데 나는 백설탕은 좋아하지 않기에 아까 사 온 배를 두 개 꺼낸다. 조각난 배를 면보에 넣은 다음 꼭 짜서 물만 냉면 육수에 투하시킨다. 만약 귀찮다면 갈아 만든 배를 한 캔 정도 넣어도 괜찮을 것 같다. 애초에 귀찮은 사람은 밖에서 냉면을 사 먹었겠지만
이제 소금으로 간을 맞춰야 한다. 냉면이라는 음식의 특성상 차가운 온도에서도 간이 맞아야 한다. 요리를 좀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음식의 온도가 올라갈수록 짜거나 매운 맛이 더 잘 나기 마련이다. 반대로 온도가 내려갈수록 맛이 혀에 잘 전달되지 않는다. 냉라면을 무턱대로 집에서 끓이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래서 살짝 짭짤하다고 느낄 때까지 소금을 계속 부어야 한다. 생각보다 엄청난 양의 소금이 들어갈 것이다. 짐작컨대 냉면 한 그릇에 들어있는 나트륨 함량이 웬만한 한국 음식을 능가한다. 우리가 '닝닝하고 슴슴하다'라고 맛있게 먹는 평양냉면도 사실 고기 향 + 소금 맛인 거다. 그래서 집에서 냉면 육수를 한번 만들고 나면 앞으로 식당에 가서 냉면을 시킬 일이 훨씬 적어질 것이다.
이제 육수를 식히면 된다. 한국이었다면 베란다에 놨겠지만 미국 아파트는 베란다라는 개념이 잘 없기 때문에 그냥 식힌다. 국물이 얼추 식고 나면 면보로 이물질과 기름을 걸러 내주면 된다. 식힌 국물을 먹어보면 아까보다 간이 더 싱거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소금을 꺼내 간이 맞을 때까지 넣어준다.
완성된 육수는 유리병이나 통에 1인분씩 나눈 다음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을 하면 된다.
03. 고명
아까 식혀놓은 양지와 사태를 썬다. 배는 새로 꺼내 채를 썰고 아까 챙겨놨던 대파 잎도 썰어준다. 원래 동치미를 넣었다면 동치미 무나 김치가 함께 들어갔겠지만 그런 럭셔리가 없기에 한인마트에서 얇게 채 썬 무김치를 사 온다. 사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냉면 위에 고명으로 살짝 올려봤는데 육수의 향을 끌어올려줌과 동시에 간도 맞추는 훌륭한 감초 역할을 한다. 오이가 있다면 오이도 썰고 마지막으로 삶은 계란을 잘라 준비한다.
04. 시식
시판 면을 끓인 다음 찬물에 잘 씻은 후 물기를 꽉 짜준다. 평소에 잘 쓰지 못하는 사기그릇을 꺼내 면을 담아 둔다. 그다음 냉장고에서 식힌 육수를 붓고 준비한 고명들을 하나씩 올려본다. 그리고 필동면옥을 추억하며 고춧가루도 조금 뿌려본다.
일단 생김새는 꽤 그럴듯하다. 맛은... 음... 소금을 거의 한 바가지로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짝 싱겁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싱거움 가운데 진한 육향과 연하지만 동치미의 달고 신 맛이 난다. 을지면옥에 비할 국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서 만든 것 치고 이 정도면 꽤 제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간을 맞추고 싶다면 소금을 더 넣으면 된다. 한국에서 먹는 것만 못한다며 투덜거리면서도 한 그릇을 다 비운 것을 보니 맛이 꽤 있는 모양이다.
05. 보완점
다음번 육수를 낼 때 참고하기 위해 다음 노트를 블록체인에 영구 박제한다.
첫째, 굳이 배를 끓일 필요가 없이 나중에 면보를 사용해 짜주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것 같다.
둘째, 소고기 외에도 노계를 조금 넣고 끓이면 더 풍미가 좋은 육수가 될 것 같다.
셋째, 기회가 되면 제면기를 사서 생면을 뽑아보고 싶다. 식당에 비해 5% 정도 부족한 맛의 반은 육수의 차이 그리고 나머지는 반은 면발인 듯하다.
한국에 계신 스티미언들이 이 글을 본 뒤 맛있는 냉면을 한 그릇 사 먹는 상상을 하니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ㅎㅎ. 그래도 다들 평양냉면과 함께 하락장에서 마음도 식히고 올여름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