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5일 무령왕릉 발굴
1971년 송산리 6호분의 배수로 공사 도중 한국 고고학을 뒤흔드는 대발견이 일어난다. 백제 고분 도굴로 유명한 가루베 지온의 탐욕스런 삽질은 물론 1500년간 그 어떠한 외부인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은 ‘처녀분’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이다.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그 임자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진평왕릉이다 무엇이다 하는 무덤들은 죄다 그렇게 전해지고 있는 것일 뿐. 그런데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떡 하니 박힌 지석까지 발견된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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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그릇은 큰 일을 치를 때 드러나는 법이다. 발견 이후 무령왕릉에서는 또 하나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한국 고고학계의 태두 김원룡과 공주 박물관장이 현지에 달려왔을 때는 이미 빅뉴스에 흥분한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심지어 중앙일보 기자는 “자신에게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화재 관리국 과장의 뺨을 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간단한 발표를 한 뒤 살기등등한 기자들의 기세에 눌린 김원룡은 고고학 발굴 사상 전무후무할 일을 허용하고 만다. 발굴 전 사진 촬영을 허가한 것이다. 그것도 무덤 안에 들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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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은 공영방송 KBS에게 양보됐다. 그 뒤는 가장 공정한 승부 가위 바위 보가 이어졌다. 한국일보 2등 중앙일보 3등.... 1명 당 3장이라는 제한을![])와 침묵 속에 지켜져 온 왕릉의 비밀은 열리자마자 플래쉬와 구둣발에 짓밟혔고 이 와중에 누군가의 발에 밟힌 청동 숟가락이 부러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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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의 회오리가 끝나고서야 김원룡은 제자에게 실측을 지시했고 자신은 회의를 연다. 회의 결과는 “가능한 빨리 발굴을 끝내는 것이 보도진이나 구경꾼과의 마찰을 줄이는 방법”이라는 것. 그리고 발굴 작업은 밤을 새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8시간 후 무덤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1500년의 역사가 8시간만에 끝장이 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있을 수 없는 고고학적 참사였다. 김원룡은 이 참사를 평생 동안 후회했다고 하지만 그가 후회할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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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각하에게서 전화가 왔고 공주박물관장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 진상차 서울로 올라오는데 김원룡은 그와 함께 청와대에 들어간다. 그 유물을 받아든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이게 순금인가?” 하면서 팔찌를 휘었다 폈다 하시는 완력을 발휘하셨고 대한민국 유수의 ‘학자’들은 식은 땀만 흘리며 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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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참사’였지만 그 참사는 숨죽이며 계속되고 있다. 뭔가 이상한 유적이 나오면 무조건 없애고 본다는 건설업계의 전설은 이미 공공연하다. 백제 풍납토성 유적이 발견되었을 때 발굴이 끝날 때까지 공사 중단은 물론 경비까지 대야 하는 법 아래에서 건설 회사는 부도가 났다. 그리고 그 부담은 놀랍게도 나라가 아니라 재개발 주민에게로 돌아갔다. 주민들이 갹출을 해서 발굴 비용을 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재개발도 진행이 되지 않는 것이 ‘법’이었던 것이다. 어느 학자가 그랬다. “이 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다고 하기엔 남아 있는 것이 너무 없다.” 당연하다 우리가 없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