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나 나름대로 세상을 알아가는 거예요. 이 작은 공간에서. 난 여기가 좋아요. 책하고 나하고 대화하는 거 같거든.”
이태원의 중고영어책 서점에서 만난 최기웅 사장(74)은 서점을 연 지 4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종이 냄새 그득한 이곳이 좋단다. 한평생을 이곳에 내맡긴 그가 일궈온 포린북스토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화창한 주말이면 발 디딜 틈을 찾기 힘들 정도의 인파가 모여든다. 밤이면 어디서 쏟아져 나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잡지와 블로그에 소개된 맛집이 한 건물 건너 하나. 분위기 좋기로 소문난 카페는 수도 없다. 이태원 경리단 길 주변의 풍경이다. 그 뜨거운 젊음의 거리 입구 즈음에 중고영어책 서점 포린북스토어(Foreign Book Store)가 있다.
고집의 역사
이태원의 서점, 그것도 영어로 된 책만 취급하는 서점의 주인은 왠지 영어에 능통하고 세련된 교양인일 것 같았다(최기웅 사장이 그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적어도 일흔넷보다는 젊을 줄 알았다. 내 고정관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모든 예상이 정확히 빗나갔다. 1973년 문을 열었으니 포린북스토어는 올해로 마흔세 살이다. 이태원에 터를 잡기 전 종로와 명동의 노점에서 헌책을 팔던 시절까지 합하면 쉰에 가까울 터. 그 사이 판잣집이었던 서점은 벽돌집이 되었고, 젊은 청년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젊은 시절, 미술을 좋아했던 최 사장은 외국 미술책을 보다가 당시 국내엔 없던 컬러 책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무엇에 홀린 양 책을 수집했다. 군 제대 후 먹고살기 위해 수집한 책들을 명동, 을지로, 청계천 등지에 갖다 판 것이 시작이었다.
“책을 구하러 파주, 문산 등 미군 부대 주변엔 거의 다 다녔어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폐품 중에는 라디오나 재봉틀 같은 값나가는 것들이 최고 인기였고, 영어책을 찾는 사람은 나뿐이었죠. 제일 값이 안 나가니까 책 장사라고 괄시도 받고 그랬어요.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나일론 끈 같은 것도 없을 때라 붕대로 감아서 들고 왔죠. 손이 덜 아프거든요. 젊어서 힘이 좋을 때니까 보따리 두 개를 저만치 갖다놓고 와서 또 갖다놓고, 하루에 한 번 다니는 버스를 타고 그렇게 책을 수집했어요.”
40년도 더 된 일들이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기억들이다. 그 긴 세월을 버텨낸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었을까. 업종을 변경할까, 이민을 갈까,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서점을 붙잡고 있었다. 최 사장은 젊은 사람들에게 돈을 좇아 직업을 갖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당부한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해요. 함부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값지게 살아야지. 우왕좌왕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한 가지 길로 고집스럽게 가는 거예요.”
그 우직한 고집이 평생 서점을 지켜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포린북스토어는 최근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되기도 했다(서울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공간들, 서울시 선정).
언제나처럼 내일도
긴 세월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서점을 스쳐 지나갔다. 특히 영어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나 이팔호 전 경찰청장도 있었다. 지금은 주로 영어 강사나 주재원, 각 나라 대사들과 대사관 직원들이 찾아오는데, 다큐를 보고 찾아오는 젊은 손님들도 늘었다. “이거 하면서 책 읽는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어요. 그게 보람이라면 보람이지.” 멀리서 오는 손님들 걱정에 책 가지러 갈 때를 빼고는 매일 문을 연다고 하니, 최 사장의 손님 사랑이 감히 짐작된다.
인터뷰 말미 최사장의 아내 김영자 씨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열심히. 이제 여행 다니고 쉬라고 해도 싫다고, 하는 데까지는 하겠대요. 아무도 못 말려요.”
쑥스러워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이 서점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다. “날 먹여 살리고, 우리 애들 학비도 나오고, 이게 내 생활이었죠. 어디 여행을 가도 생각은 서점에 와 있어요. 여기 있는 게 편한가 봐요. 하지만 몇 년만 더 하고, 몸뚱이가 그만하라고 하기 전에는 그만두려고 해요. 후계자도 찾고 있는 중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이거 안 하려고 하지만… 진짜 똑똑한 사람들은 할 텐데 말이에요.” 50년쯤 후에 이태원 거리를 찾았을 때, 그 자리 그대로 포린북스토어가 서 있기를 바란다.
주소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2동 553
전화번호 02-793-8249
영업시간 10시 ~ 21시, 연중무휴
글·사진 김연지
Posted from my blog with SteemPress : http://231.jeju.kr/%eb%ac%b8%ec%9d%84-%ec%97%b0%ec%a7%80-40%ec%97%ac%eb%85%84-%ec%9d%b8%ec%83%9d%ec%9d%b4-%eb%90%9c-%ec%84%9c%ec%a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