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과정에 따라 인과를 예측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인간은 선택이라는 갈래길 앞에서 매번 손바닥에 침을 튀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용한 점쟁이의 예지력에 의해 프로그래밍 된 길을 선택한다고 해도 수없이 나열돼 있는 우연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 어느 조상의 자손이고 강은 한 길로만 휘돌아 나간다. 결과론적인 필연의 세계라지만 시간의 선상은, 워밍업 중인 알 수 없는 우연들로 득실거린다. 게다가 논리와 이성은 언제나 감정의 호르몬으로 뒤범벅이다. 그래서 선택은 즉자적이고 선험적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일견 선택이란 위태로운 경험인 것처럼 보이지만, 본능 안에 내장된 소프트웨어는 사회성과 이기심을 적당히 제어하며 개체에 일관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개체는 선택에 따른 색깔을 드러낼 뿐이다.
같은 조건이라 해도 개인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우연의 지배를 받는데 하물며 조건조차 같을 수 없다면 선택은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를 갖는 것일까. 경험으로 단련된 필연 찾기에 의하면 선택은 인연과 맞닿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연의 생성, 소멸과 그 질감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선택이란 다른 말로 하면 감정적인 선택을 의미하고, 어떤 우연의 부름을 받을지 알 수 없으므로 인연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결과로써의 인연 앞에 순종해야 내 선택의 필연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사실 나를 합리화하려는 방편이다. 다소 생경한 인연을 맺는 일이 급격한 커브 길을 운전하는 것이라면 나는 원심력에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 속도를 줄여 천천히 안전하게 운전했다. 인연을 맺고 끊는 데 있어서 특기할만한 의지를 가지지 않았고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다. 졸업을 위해 담당 교수님을 찾아갔을 때와 연애 좀 하자고 아내를 꼬드겼던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그랬다. 닮은 꼴이 별로 없는 몇 개의 직업을 선택했을 때도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었고 마침 하고 있던 일이 심드렁할 때라 별 고민 없이 갈아탔다. 이 일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이나 이 업계에서 일가를 이루고 굵은 획을 긋고 싶다거나 하는 3차 면접식의 자기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내가 맺은 인연도 그때마다 무게를 달리하며 가까워지거나 멀어졌다. 연연하지 않다 보니 어느 순간 너무 멀리 도망가 있어서 사라져 버린 실타래 또한 적지 않다.
인연을 맺는 데 있어서 나는 고주파가 아니라 저주파에 가깝다. 선캄브리아기 때 솟은 산맥이 풍화되고 남은 구릉이라고 할 수 있다. 간혹 단단한 기반암이 재미난 모양으로 남아있기도 하지만 그건 어떤 종류의 바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주로 지루한 언덕을 오르듯, 나의 인연은 맛깔나고 다이나믹한 등산로와는 거리가 멀다.
인연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의지를 피력하며 주동적인 입장에서 관계를 이끌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 것을 잘하는 사람은 조건을 인위적으로 변화시켜 의도한 바를 관철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능력자라고 부른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가장 쉬운 일인 양 해내기 때문에, 나에게 없는 슈퍼파워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능력자다. 부럽다기보다 단지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질적인 동경 정도로 볼 수 있다.
인연에는 분명 무게가 있다. 그걸 아는 까닭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가벼운 관계와 인연을 선호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가슴이 선선해지는 인연이면 더 차가워질 이유도 더 뜨거워질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 아무래도 내 방식은 이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