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안이다. 잠을 청하려 여러 음악을 들어보지만 먹은게 없어서 그런가. 영 잠이 오질 않는다.
지난 사흘간 불규칙한 스케줄로 10시간도 자지 못했다. 마지막 출근과 곧 시작될 여정에 설레서 더 그랬다.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날은 셀 수도 없다. 난폭하고 비겁하며 우리의 팁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셰프 덕분에 조금 더 쉽게 마음을 정했다. 일을 그만두겠다고 고한 날, 나는 모두를 배신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지만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셰프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나에게 딜을 해왔다. 웃으면서 거절했다. 일을 관두는 날까지도 그는 나를 설득하려는 무의미한 노력을 했다. 많이 미워했던 셰프였는데, 그저 꼭 안아 주었다. 마지막 서비스를 마치고 동료들과 애써 쿨하게 헤어졌다. 나를 여동생처럼 생각한 지브리가 있는 힘껏 안아줄 때는 조금 울컥하기도 했지만.
집에가는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매일 밤 정각마다 하얀빛으로 반짝이는 금빛 에펠탑이 오늘도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안녕, 그동안 나를 위로해주어서 고마웠어.
밤 1시가 넘어 집에 왔는데 동생들이 안자고 기다리고 있다. 내일 일찍 떠나니 미리 인사를 했다. 이 원룸에서 네 명이 북적거리고 잘도 살았다. 짐을 싸고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나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왔다. 내가 맨 것은 사실 배낭도 아니었다. 오래 전 동네 행사에서 참가상으로 받은 메이커도 없는 책가방에 양말과 쪼리 한켤레, 여분의 반팔 티와 반바지, 속옷 한쌍, 칫솔과 선크림, 스포츠타올, 침낭과 카메라, 1회용 렌즈와 선글라스, 그리고 이 노트 한권을 챙겨 넣었다. 스타킹 끝을 잘라서 레깅스처럼 신은 뒤 그 위에 9부 정도 되는 스포츠 레깅스를 입었다. 상의로는 히트텍 목폴라, 그 위에 얇디 얇은 잠바, 마지막으로 초경량 패딩을 입었다. 남미여행을 책임졌던 트레킹화와 알록달록한 스카프도 잊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몽파르나스역으로 한참을 가고 있는데 문득 체크카드를 집에 두고 온 것 같았다. 현금은 200 유로밖에 없는데.. 순례길을 마친 뒤에도 한달 간 서핑과 여행을 할 계획인데 30만원으론 택도 없다. 지금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오면 기차는 무조건 놓치고 말 것이다. 차갑게 식어 땀에 젖은 두 손으로 옷 주머니와 가방을 뒤졌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이 날만을 기다렸는데. 시간도, 승객도 멈춘 듯한 고요한 지하철 안에서 숨죽인 채 초조하게 부산을 떤 끝에 가방 속 주머니에 꽁꽁 숨은 카드를 발견했다. 긴장이 풀릴.. 틈도 없이 기차 탑승시간이 코앞이다. 지하철 역에서 기차 역까지 한참을 걸어가야하는 줄 몰랐다. 잠도 못잔 빈 속에 냅다 뛰었다.
운명적으로 기차를 잡아 타서 앉았는데 바로 출발한다. 며칠 간 잠을 못자고 길을 떠나게 되어, 무릎 위에 올려 둔 가방보다 쌓인 피로의 무게가 크다. ‘자고싶다..’ 라는 생각만 할 뿐, 까미노 길을 향한 경건한 마음을 다질 여유가 없다. 남미여행을 위해 페루에 첫 발을 내딛였던 날도 이랬다. 새벽 1시에 공항에 도착해 새벽 3시 버스를 타고 바로 길을 떠나지 않았던가. 뭐가 그리 급한걸까. 스스로를 턱없이 유유자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전쟁통같은 주방에서 일할 성격이 못된다고 한숨만 내쉬던 날도 있지 않던가. 그런데 여행할 때의 나는 다르다. 무엇 하나 놓치는 것이 아깝다. 프랑스 남부를 향해 달려가는 차창 밖으론 빠리 시내에선 볼 수 없었던 프랑스의 전원풍경이 펼쳐지고 있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되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를 눈과 마음에 담았다. 이 또한 아까워서.
목적지인 생장 피에드 포드역으로 가려면 바욘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환승까지 2시간의 여유가 있다. 배가 고프지만 기차역 근처는 어수선하니 시내로 성큼성큼 들어가 본다. 빠리 시내가 눈에 익은 내게 바욘은 동화같은 마을이었다. 큰 배낭을 짊어진 이들은 아마도 순례자겠지. 그 중에는 개를 데려온 이도 있다. 한 때는 성이었지만 지금은 학교가 되었다는 건물이 보이는 노천 테이블에 앉아 이 지역 명물이라는 바욘 햄, 잠봉이 들어간 오믈렛을 시켰다. 생햄으로 먹는 것이 나을 뻔 했지만 이렇게 현지의 여유를 느껴본다.
짬이 나서 본의 아니게 혼자 마을 구경을 하게 된 것이 마치 시애틀을 둘러보던 그 때 같다. 엄마의 사고 소식에 모든 걸 정리하고 한국으로 오던 그 날,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창 밖에 떠있는 별만 보았다. 그 기억 뿐이다. 내내 별을 본 기억, 그리고 경유지인 시애틀 시내를 하염없이 걸어 다니던 기억.
부슬비도 내렸다 말았다 하는 흐린 날인데, 이끼풀처럼 미끄러운 색을 하고 있는 강이 차뵈지는 않는다. 생각보다 큰 마을이지만 텅빈 것 같이 조용하다 싶다가도 이내 들려오는 사람들 소리에 반가움을 느낀다. 골목길 한편에는 복실한 개 한마리가 꿈쩍도 않고 앉아있다. 누굴 기다리는 걸까. 그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나야말로 누구를, 아니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