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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전부터 간간히 순례길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시작은 [산티아고 순례길 prologue] 까미노 인데
정말 간간히 쓰고 있어서 이제 겨우 2일차네요 :D
29일동안 걸었던 이야기라 지루해질까봐서
pen/travel/diary/photo 의 네 가지 스타일로
나눠 쓰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
[pen] D-1 일 그만둔지 4시간, 배낭 메고 떠나다
[travel] D-1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며
[pen] 1일차. 죽지 않으려고 걸었다
[pen] 2일차. 어둠 속에 나 혼자.
최근 글 제목은 <어둠 속에 나 혼자.>
네. 저는 혼자였습니다.
다른 분들 순례길 이야기를 보니
시작부터 일행(부부/친구/사촌)이 있으셨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혈혈단신 혼자 떠난 순례길이라
사색과 자유로움 만큼이나 고독함도 많았지요.
하지만 일행이 생겨나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마치 만화 <원피스> 나 롤플레잉 게임에서
동료가 하나, 둘 늘어나는 것처럼요.
순례길에 오르는 사람은 각양각색입니다.
유럽, 미주, 호주에서 온 사람들이 많긴 하나
일본, 러시아, 이스라엘에서 온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한국인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어요.
6~8월에는 방학한 학생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제가 걸었던 시기는 9~10월이라선지
취업/이직 준비하는 사람과 은퇴자들이 많았고
신혼여행으로 온 커플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저처럼 혼자 온 사람들입니다.
친화력이 좋거나 외로움을 타는 사람들은
얼른 친구들을 사귀어 첫날부터 일행을 만들었지만
혼자 걷고 싶었던 저는 이른 새벽 길을 떠났습니다.
암흑 속에서, 정적 속에서 몇 시간을 걷다 보니
일행과 화기애애하게 걷는 사람들에 눈길이 갑니다.
나처럼 혼자 걷는 사람들은 또 반갑습니다.
서로 부엔 까미노(좋은 길!) 인사하는데
눈빛을 보면 압니다.
사색이 필요한 지, 대화가 필요한 지.
우연히 아이톤을 다시 만났을 때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고
어느새 함께 걷고 있었지요.
아이톤의 국적은 스페인이며
피레네로 떠나던 첫날, 숙소 식당에서
‘산티아고에 오는 모든 이에겐 구하는 것이 있다’
라는 말을 남겼던 친구입니다.
사랑때문에 프랑스에서 7년을 살았다고 하는데
말 끝을 흐리길래 더는 묻지 않았어요.
아이톤과 오렌지쥬스를 마시며 잠시 쉰 뒤에는
마치 당연한 듯이 함께 걸었습니다.
그러다 혼자 걷고 있는 프랑스인 에릭을 만나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우리 셋은 함께 걷고 있었어요!
<▲프랑스에서 온 에릭과 스페인 출신 아이톤>
다음 알베르게가 있는 첫 마을 수비리(Zubiri) 입니다.
이 마을에 묵을까? 좀 더 갈까?
아직 걸을 시간과 체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다음 마을에서 자기로 하고 저녁거리 장을 본 뒤,
부슬비를 피할 겸 파라솔 아래 노천 테이블에서
맥주와 와인 한 잔(사실 두 잔..)을 하며 또 쉬어 갑니다.
그러고 있는데 다시 한 번 더그 등장!
자연스럽게 동석해서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나는 다시 걸을래. 너는? 하며 일어나길래
걸음이 느린 저도 먼저 출발하기로 합니다.
아이톤과 에릭은 그곳에서 여유를 더 즐긴 뒤
다음 마을 공립 알베르게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이제 저의 동행은 더그입니다.
더그의 국적은 캐나다.
제가 딴 사람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알게 된,
은퇴하고 여행다니는 멋쟁이 할저씨입니다.
피레네에서 함께 하산하고 저녁도 같이 먹었지요.
본인은 순례자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왼쪽이 캐나다인 더그, 그리고 성당 재건 후원자>
더그와 함께 걷다가 낡은 성당을 발견했는데
누군가 성당 재건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순례길을 걷고 있다 이 버려진 성당을 발견하고
재건을 결심하고 후원과 봉사를 하고 있었지요.
성당 앞에 보이는 것은 작은 묘지입니다.
혼자 걸을 땐 분명 걸음이 이보다 한참은 느렸는데
동행이 생기니 발걸음에 힘이 나서 활기차게 걸어요.
혼자 걷고 싶어 혼자 걸었던 게 분명한데도요!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며
지루할 틈 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라라소냐(Larrasoña).
저는 가장 저렴한 공립 알베르게로,
쾌적하고 아늑한 숙소를 원하는 더그는
아쉽게도 사설 알베르게로 향합니다.
더그와는 이렇게 헤어지는 줄 알았는데...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이 머무는 숙소를 뜻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 travel 포스팅에서!)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5유로를 내고 침대를 배정받고 여권에 도장도 받아요.
짐을 풀고 샤워와 빨래를 하고 나니
에릭과 아이톤 등장. 이렇게 반가울 수가!
어느새 뒷마당에 놓인 테이블 앞에는
낯설지만 반가운 순례자들이 하나, 둘 모여 앉습니다.
리투아니아에서 온 씨마스는 피레네에서 봤었고,
덴마크에서 온 사이먼, 이탈리아에서 온 프란체스카,
독일에서 온 남매 레아와 마르코,
네덜란드에서 온 윌버트.
한국사람도 둘 있었는데
어쩐지 저희와 어울리지는 않았습니다.
윌버트가 가져온 와인을 나눠 마신 김에
고마운 윌버트 몫까지 저녁을 합니다.
재료는 아이톤이 샀기 때문에
에릭이 고기를 굽고 저는 파스타를 만들었어요.
꽤 그럴싸한 저녁에 모두들 싱글벙글.
고기 살 때 함께 산 와인도 개봉해서 먹는데
정말 따봉이예요! ;ㅁ;
(...이렇게 일기에 쓰여있네요.)
순례길 둘째날, 총 25km 를 걸었습니다.
6시 10분에 출발해서 2시 20분에 도착했으니
8시간을 걸은 셈이네요. 중간에 두번이나 쉬었지만.
나중에는 25km 를 5시간만에 걷습니다.
오늘 아침, 그 적막한 어둠 속에 혼자서 걸었는데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리 오랜 친구들처럼 편안한지요?
신기한 노릇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