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성숙
- 고양이 양육 에세이 (1)
<왼쪽이 란포(수컷, 2015년 4월생, 2015년 5월 입양), 오른쪽이 란마(암컷, 2017년 4월생, 2017년 8월 입양)입니다.>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는 처지로 이것저것 책을 뒤져보며 반려동물에 대해 읽다가 보니 ‘유형 성숙’이란 개념이 있었다. 반려동물은 성체가 되어도 심리적인 부분은 ‘아이’인 형태로 성숙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들을 아이로 대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그들의 삶을 생각하다 보면 납득이 된다.
고양이의 경우는 그래도 개보다 훨씬 늦게 인간의 삶에 포개졌고 야성이 남아 있는 동물이다. 개만큼 품종개량을 많이 당하지도 않았다. 품종개량하기 전에 이미 덩치가 작았다는 점도 심하게 품종개량 당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고양이는 심각하게 비만이 아닌 이상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 길고양이로 살 수 있다. 만약 핵폭탄이라도 터져 아포칼립스의 상황이 발생해 인간의 문명이 붕괴하고 함께 밖에 내몰린다면 훨씬 더 무력한 쪽은 내 쪽일 것이다. 내 고양이들은 자기 먹을 걸 찾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고 반려동물의 삶이 전적으로 내게 의존적일지라도 크게 죄책감 느낄 일은 없다. 이 녀석의 바깥에서의 생존력은 ‘만에 하나 내가 얘를 잃어버린다면’이란 가정 하에서만 문제가 된다. 인간 삶의 주기는 개 고양이보다 훨씬 길다.
그러니 내가 그들의 삶을 내게 예속시킨다 하더라도 무책임한 일은 아니다. 내가 예기치 않게 급사할 경우 대신 책임져줄 사람만 점지해두면 된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던 어느날 인간이 인간을 키운다면 전혀 다른 생각을 해야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한국의 부모들이 별로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대부분은 자녀의 성숙을 바라지 않아도 자녀는 독립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의 인식이 그렇다면 오히려 부모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자녀는 ‘유형성숙’할 가능성이 높게 된다.
가진 게 별로 없다면 자녀에게 ‘경험’을 제공하는 데에 금방 한계를 느끼겠지만, 돈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 공부를 더 하라고 할 수도 있고, 자기 권세가 닿는 직장이나 조직에 낙하산으로 꽂을 수도 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며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자녀는 다른 세상사보다 부모를 대하는 방법에 훨씬 더 신경을 쓸 것이다.
나이든 이들일수록 누군가가 자신에게 집중하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개를 애지중지하는 이들이 자주 하는 ‘고양이는 주인을 몰라봐’라는 푸념이 그런 심정에 닿아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흔한 경우는, 재산을 형성하고 늙은 사람은 젊은이들을 통제하려 들고, 그러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젊은이들에게 본인을 주목하지 않는다고 성질을 부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젊은이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꼰대’들을 욕하지만 그들부터가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구하는 방법, 없는 사람들의 성질을 무시하거나 맞받아치는 방법을 익히게 될 거라는 거다. 그리고 그 적응의 길 끝에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그들이 욕하던 그 ‘꼰대’다.
우리 커플의 큰 아들이라고 볼 수 있는 란포(수컷, 2015년 4월생, 2015년 5월 입양)는 둘째인 란마(암컷, 2017년 4월생, 2017년 8월 입양)를 맞이한 후 지나치게 어른스러워 보인다. 우리의 느낌인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실히 점잖아졌다. 700g짜리 5주 때부터 애지중지한 입장에선 서운하기도 하다. 란포 역시 그래도 ‘유형성숙’이겠지만 앞으로 그 양상은 다소 다를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개 고양이처럼 우리에게 제법 가까운 동물도 ‘과거’와 ‘미래’의 개념 없이 그저 ‘오늘’만 사는 이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오늘’의 상황에 더욱 잘 집중하여 자신의 위치를 찾아내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많은 인간들은 ‘과거’와 ‘미래’를 관통할 수 있는 종족 특유의 능력을 자기보다 나이 어린 인간들이 아무리 많이 생겨도 여전히 본인이 가장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는 식의 ‘유형성숙’을 정당화하는 데에 쓰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