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원주에서 벌어진 항공 및 포병전투를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187공수연대의 전투를 중심으로 원주지역에서 벌어진 보병전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전쟁에 있어서 항공과 포병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보병에 의한 전투 없이는 작전을 종결시킬수 없습니다. 물론 현대전에서는 보병의 중요성이 다소 감소되는 추세이지만, 1951년 2월 한반도에서 보병은 결정적인 수단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투가 벌어지기전 187공수연대 예하 대대는 섬강과 원주천이 만나는 원주 진입지역 부근의 300~400고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주로 야간을 이용해 전진하는 중공군을 미리 확인하기는 매우 힘든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수연대는 중공군이 올 수 있는 예상지역을 미리 판단하고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진지로 신속히 철수해서 방어할 수 있도록 전차를 추가해 기동력을 증가시켰습니다.
원주천, 제천방면
원주천, 횡성방면
공수연대는 원주천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치했습니다. 현재는 개발되어 깅폭이 얼마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 두배정도 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배치된 유엔군은 항공정찰에 의한 적의 이동로를 확인한 뒤 포병에게 연락을 취합니다. 우선 적을 감시하는 병력을 배치시킨뒤, 대부분의 병시들은 유개호로 들어갔습니다.
포병의 포사격과 비행기에서 떨어뜨리는 네이팜탄들이 중공군 지역에 작렬했습니다. 피아구분이 불명확한 상태에서 항공기에서 투하된 폭탄이 유엔군 진지로 날아들어 수십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유엔군의 포격과 항공공격이 거세자 주춤하던 중공군은 원주천 주변 고지로 숨어 들었습니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공수연대는 즉시 진지에서 총을 쏘며 적을 사살했습니다.
워낙 숫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은 유엔군의 사격에 아랑곳 하지 않고 진지로 달러들어 진지에서는 피아가 혼재된 상태로 백병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공수연대 2대대 E중대지역에서 보고된 전투결과는 당시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중대에서 발생한 피해는 전사 18명, 부상 45명이었습니다. 반면, 중공군의 시체가 중대 방어진지상에서 450여구가 회수 되었습니다.
이 전투로 중공군 2개사단은 거의 괴멸되어 더 이상 전투에 투입되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중공군은 다시 전 전선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여 4월 중순까지 철수행동을 계속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로 인해 전선은 38도선 일대까지 북상되었습니다.
원주에서의 전투는 그동안 지평리에서의 승리 일부분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원주전투 승리가 없었다면 지평리에서의 승리도 의미가 퇴색할 수 있습니다. 원주에서의 성공적 방어와 중공군 2개사단의 격멸로 서부전선에서의 유엔군 공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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