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책의 재미에 빠져 있을 때 쯤
베스트셀러 외에 다른 재미있는 책이 없을까 싶어서
인터넷 검색으로 서평글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이기호 작가를 알게 되었다.
한 블로거가 ‘세살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 책이
무척 재미있다고 추천을 해줬는데,
나는 ‘세 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로 검색하는 바람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를 읽게 되었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이 제목이 참..맘에 들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야기의 내용도 좋았지만
이기호 작가만의 특유한 표현이 참 좋았다.
가령 “지랄도 풍년, 산성비를 소방호스로 잘못 맞았나..” 라든가
“몸과 마음 모두 세탁기에 넣어 놓고 오랫동안 돌리지 않은
빨래처럼 후줄근해진 상태였다."라는 표현이 그랬다.
며칠 전 도서관에 가서 책 목록을 쭉 훑어보는데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 책이 보였다.
하늘색 표지가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읽던 책은 잠시 냅두고 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도 이기호 작가만의 특유한 표현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사랑니가 반으로 조각이 나 생긴 통증을
“마치 볼리비아에 살던 염소 한 마리가
내 사랑니에 올라타 바득바득 뿔을 갈고 있는 느낌이었다.”
라는 말로 표현을 해주고 있는데
그 통증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도 전해져왔다.
장모님의 음식솜씨는
“이런 비유를 하는 것이 조금 버릇없고 염치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뭐랄까 재료와 재료들이 각기 배낭을 메고
어디론가 긴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너무도 적절한 비유가 아닌가 싶었다.
뭔가 알겠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리고 작가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목욕탕에서
머리를 감겨주는 부분에서
“마치 무슨 해초를 헹구는 일꾼처럼”
감겨주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런 표현을 접했을 때 꼭 메모를 해 놓는다.
어쩌면 같은 한글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표현을 해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 <그의 어깨>
장인어른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을 손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놀이터와 공터에서
시간을 보낸 뒤 돌아오셨다. 눈치를 보아하니 장인어른은 오전 내내 두 아이의
자전거를 밀고 끌고 하신 모양이었다. 점심 무렵 잠깐 식사를 하러 들어오신
장인어른의 등허리는 땀으로 검게 변해 있었다.
(중략) 장인어른에 대한 이야기였다. 왼쪽 어깨의 인대가 늘어나
한 달 째 일손을 놓고 있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다시 현장으로 나가기 위해
당신의 병을 애써 숨기고 있다는 이야기.
(중략) 그러면서도 계속 장인어른의 등이 떠올랐다.
땀으로 검게 변해버린 등허리,
온종일 두 아이의 자전거를 양손으로 끄느라 변해버린....
나는 날 좋을 때에도 내가 힘들다는 핑계로
첫째녀석에게 주로 티비만 틀어주곤 했다.
그래서 날 좋은 주말이면 아빠는 항상 첫째녀석과 놀아주려고
자전거를, 그리고 유모차를 끌고 토끼를 보러 공원엘 가셨었다.
그때는 막연한 감사함만 있었다.
어느날 첫째녀석이 심심해하는 것 같아
맘먹고 토끼를 보려고 공원에 갔었다.
토끼가 있는 공원은 집에서 횡단보도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하고
걸어서 30분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었다.
토끼를 보고 온 후 너무 먼 것 같아
다음날은 동네 공원으로 가기로 했다.
동네 공원은 거리는 가까웠지만
차가 자주 와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녀야 했고
무엇보다 공원 올라가는 길이 너무 가팔라서
20킬로가 다 되어가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채
밀고 올라가는 건 쉬운일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자전거를, 그리고 유모차를 밀고
토끼를 보러 먼길을, 공원에 가러 가파른 길을 오르고 나니..
아빠는 이 먼길을...이렇게 힘든 길을 어찌 다니셨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져왔다.
젊은 나도 힘든데...
지금까지 한번도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유유히 집으로 가셨던 아빠였다..
이 글을 읽었을 때 새삼 아버지의 깊은 손주 사랑이 떠올라 잠시 눈물이 났다.
그리고 또 한번..감사함과 함께 잘해드려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지난주에 첫째 아이만 데리고 공원을 나갔다가 내친김에 피자 집까지 갔다.
어느 책에선가 첫째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서는 간간이 동생들과
떨어져 따로 외출도 하고 시간도 보내주어야 한다는 문장을 읽었기 때문이다.
(중략) 문제는 피자 집에서 일어났다. 주문을 하고 포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이가 제 뒤에 서 있던 한 아이에게 말을 건넨 모양이었다.
뭐. 별다른 말은 아니고 “너 어느 유치원 다니니?” 하는 질문이었다.
한데 뒤에 서 있던 아이는 그 말이 꽤 기분 나빴는지 다짜고짜 아들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말 걸지마, 자식아. 나 일곱 살이야.”
주먹을 맞은 아들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도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걱정마라, 아들아. 이럴 때 나서라고 아빠가 있는 거란다.
(중략) 그러나 아무런 말도 못하고 때마침 나온 피자를 들고
얌전히 그곳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아이의 옆에, 이제 막 화장실에서 나온
추리닝 차림의 우람한 한 남자가 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고 웃으면 안 되는데 박장대소를 했다.
꽁트 같은 이야기 느낌이 물씬 났다.
나도 첫째녀석을 데리고 나갔다가 이런 적이 있었다.
어떤 아이가 이유없이 첫째녀석을 밀었다.
첫째녀석이 날 쳐다보기에 난 그 아이에게
그러면 안된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그 아이랑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만 했다.
아이가 상대방 아이에게 맞았을때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첫째녀석만 다독이고 있었는데,
그 아이 엄마가 그런 상황을 눈치챘는지
나에게 다가와서 자기가 미안하다고
너무 공손하게 사과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 엄마는 개념이 좀 있는 엄마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그 아이에게 뭐라고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상대방 아이가 이유없이 우리 아이를 밀치거나
때렸을 경우 어찌하는 것이 맞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혹시 좋은 방법이 있으신 분은...팁을 주시면 좋겠다.
- <가족사진>
오랜만에 찍는 가족사진이어서 다들 약간 달뜬 표정이 역력했다.
어머니와 형수님, 그리고 아내는 전날 저녁부터 거실에 주르르 누워
마스크 팩을 했고, 아버지는 가발을 쓰고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유치원에 다니는 두 손자들에게 진지하게 의견을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짐짓 무신경한 듯
“거, 요즘 포토샵으로 다 보정해주니까 신경쓸 거 없어요”라고 말했지만,
정작 당일 아침 제일 먼저 미용실로 뛰어가는 속
좁은 모습을 보여 모두에게 원망을 듣고 말았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가족들 모습에 너무 정겨움이 느껴졌다.
아버님께서 나에게 둘째 낳으면
가족사진 찍으러 가자고 하셨었는데..
잊기 전에 날 잡아봐야겠다.
우리도 가족사진을 찍는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상상이 되었다.
가족이 모여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따뜻함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이 책은 작가의 말 대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가족 소설이다.
이 책 속에는 가족과 관련된
일상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있다.
내가 꾸린 가족이 생긴 이후로는
가족 이야기가 무엇보다 제일 따뜻하고
제일 재미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유쾌하면서 따뜻하면서
가벼운 책을 읽어 좋았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일상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