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가차 없이 내던져진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그려낸 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이 시대의 인간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불안'을 그림으로써 독자적인 자기세계를 만들어낸 화가입니다.
그의 대표작 <절규>가 그려진 때는 19세기 말로 프로이트, 니체와 같은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등장해 '실존의 불안'이라는 문제를 깊이 파고들던 시대였습니다.
실존주의에서 '실존'이란, 이 세계에 부조리하게 내던져진 우리의 존재를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원해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세계는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불합리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뭉크가 자신의 그림을 통해 표현한 것은 세상에 가차 없이 내던져진 인간이 끌어안고 있는 '존재론적인 불안감'입니다.
뭉크 이전의 화가들 중에도 슬픔과 고뇌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더러 있었지만 그처럼 뭔지 모를 실존적인 불안감을 도전적으로 표현해낸 사람은 없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S.A.Kierkegaard, 1813~55도 말했지만 이 시기에는 불안이라는 것이 인간의 지배적인 감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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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절규 1893년 템페라화 83.5x 66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불안은 단순한 공포와는 다릅니다.
우선, 공포는 자신을 두렵게 하는 대상이 확실한 반면 불안은 막연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불안한 건지 그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마치 음습한 밤공기처럼 자신을 향해 몰려들어 짓누른다.
그런 불안감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도망칠 수 없다.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다.'
그것이 뭉크의 그림에 표현되는 불안입니다.
<절규>에서는 다리 옆에서 귀를 손으로 꽉 막은 사람이 겁에 질려 입을 벌릴 채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여동생이 당시 입원해 있던 정신병원의 맞은편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실제로 뭉크는 여기서 마음의 병을 앓는 여자의 절규를 들은 적이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에 그려져 있는 사람은 정신병을 앓는 여성이 아닙니다. 화집만 봐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림 왼쪽 상단의 붉은 하늘에는 작은 글씨로 "이것은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잇는 그림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을 통해 뭉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세계에 던져진 우리의 존재가 본래 이렇듯 절규하고 싶은 모습이 아닐까 하는 것인 듯합니다. <명화를 결정짓는 다섯가지힘>
<뭉크의 글>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와 피오르드에 걸린 칼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뭉크가 1892년 1월에 남긴 글은 매우 유명하다.
화자의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곡선으로 표현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구름으로 나타내었으며, 화면하단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인물은 마치 유령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데, 뭉크는 깊은 좌절에 빠진 사람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와같은 형태의 왜곡을 하였다고 한다.<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