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없어진 ‘일년만 미슬관’
미술인들만 아는 전시공간
아 티 스 트 런 스 페 이 스
나는 미술 작가다. 매년 겨울과 봄 사이에 “제 작업은..”으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어딘가에 지원서를 낸다. 가끔 붙어서 운 좋게 전시를 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낙방의 고배를 마신다. 미술 잡지와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메이져 공간에 선정되기는 당연히 어렵거니와, 공모를 여는 어느 곳이나 경쟁은 치열하다. 날 간택해주는 곳이 없으면 전시를 할 수 없다. 공간을 지원해주는 곳이 예전에 비해 늘었다고는 하지만 작가의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어느 해였다. 기대했던 A공모에도 떨어지고 설마했던 B공모도 떨어졌다. 나름 안전빵이라고 생각했던 C도 떨어졌고, 공모를 냈었는지조차 까먹었던 D공모에서도 낙방을 알려왔다. 지원서가 문제였을까. 구구절절 간절하게도 써 봤고, 마치 대가처럼 쿨하게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는 모두 허사였다. 날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그간 치열하게 완성했던 작업은 기약없이 묻히는 것일까. 슬펐다.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마를 무렵 어떤 공모 글을 보게 됐다. 심사 없이 누구나 전시를 열어준다니? 바로 이거다! 앞뒤 알아보지 않고 바로 지원서를 보냈고 그 곳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진, 이름처럼 일 년만 운영하고 역사 속으로 없어진, <일년만 미슬관>이다.
전시를 결정하고 장소를 보러 답사를 갔다. 당황했다. 사간동의 미술관 거리나 인사동같은 풍경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유동인구와 문화시설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가끔 초등학생 몇 명이 출몰하는 ‘그냥 동네’ 그 자체였다. 또 전시장은 큐레이터도 없었고 관장도 없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7명의 작가들이 합심하여 그 공간을 일구어냈고, 그들이 공동 운영하는 전시장이었다. 전시 조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원서에 냈던 작업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내가 여태껏 알고 있었던 ‘전시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공간이었다.
내 개인전 <블라인드 필름, 2016>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Artist Run Space)
외진 곳에서 마음껏 공간을 실험해볼 수 있는 <일년만 미슬관>에서 나는 개인전을 치렀다.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그러나 두려워서 실행하지 못했던 것을 그 곳에서 발표했다. 아무런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전시는 향후 내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소수의 지인과 몇몇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 방문했을 뿐이지만 내겐 아주 소중한 전시였다. 애초에 7인의 운영 작가들도 본인들의 전시 공간을 찾다가 “차라리 우리가 전시할 공간을 우리가 만들자!” 라는 마음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7인의 작가들도 그 공간에서 1년간 정말 다양한 실험적인 전시를 열었다.
몇 해 전부터 이런 운영 방식의 공간이 서울 곳곳에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전시 공간을 통칭해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라고 부른다. 공통적으로 일반 대중이 방문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이 공간들 중 일부는 미술인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기도 하다. 또 어떤 공간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작업을 하면서 공간 운영까지 해나가기가 수월할 순 없기에 내년에도 존재하리라고 확실하게 기약할 수 없는 공간들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마치 바톤 터치를 하듯이 이러한 공간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왜일까?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가 유행하게 된 이유는 미술인들이 기존 미술계에 여러 가지 경로로 회의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매년 도전해야하는 치열한 공모, 경쟁, 극히 소수만 택해지는 상황, 또 인맥과 인맥으로 은밀하게 이뤄지는 신물나는 미술계 구조에 젊은 작가들이 반응하고 있는 현상이 아닐까.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자신만의 플랫폼’을 만드려는 시도는 예술의 전환기에 항상 일어났던 일이다. 혁명은 항상 변방에서 일어났다고 했던가. <일년만 미슬관>을 비롯한 많은 공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서울에는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신생 공간이 도처에 숨어 활동하고 있다. 그 중 세 공간을 소개하려고 한다.
심사는 선착순으로 : 공간 황금향
‘정말 이런 곳에 전시장이 있어도 되나?’ 싶은 곳에 전시장이 있다. 갈현동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산꼭대기다. 대찬 오르막을 오르다보면 전방에는 절이 보이고, 바로 옆에 허름한 주택이 있다. 이곳이 바로 <공간 황금향>이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하는 반지하의 조그만 공간에는 영상과 평면 작업이 몇 점 전시되고 있었다. 깔끔하고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날것 그대로의 분위기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아주 진한 맛이 느껴졌다. 1층에는 공간을 운영하는 오제성 작가가 거주하는 작업실 겸 다목적 공간이 있다.
<공간 황금향>의 특징은 별도의 전시 공모가 없다는 점이다. 대신에 두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는 작가의 메인 작업이 아닌 미공개작, 습작, 실험작만을 전시할 수 있다. 또 이미 타 공간에서 무수한 거절을 받아왔을 창작자들을 위해 ‘선착순 검토제’로 작가를 선정하지만 미흡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운영위원과 함께 논의하는 과정도 거친다. 물론 전시 매체나 장르에도 제한이 없다.
공간의 특성상 작가의 실험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고 한다. 전시 때마다 열띤 좌담회도 개최한다고 하니,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공간 황금향>은 한 번 가보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공간 황금향>을 방문하려면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황금향 인스타그램
젊은 작가들의 붓질 : 합정지구
합정역 인근의 주택 지역에 있는 <합정지구>는 2015년에 개관했다. 전면이 오픈된 유리창으로 되어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도 그 안에 전시된 작품을 힐끗 볼 수 있다. <합정지구>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꽤 알려진 공간이 되었다. 동네 주민도 가끔 오며가며 공간에 관심을 갖지만 애초부터 이 공간은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나 컬렉터를 타깃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운영자 이제 작가의 말을 빌어보면 ‘작가들 간의 교류와 소통’에 목말라 이 공간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 수차례 방문해 본 경험으로 내가 개인적으로 체감하는 <합정지구>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회화적인 붓질을 구사하는 젊은 작가의 페인팅 위주로 전시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다른 매체보다 특히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방문해야 할 포인트다. 또 오프닝 음식이 맛있다는 점이다. 오프닝에 갈 때마다 그 좁은 골목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작품과 전시가 좋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음식이 맛있다는 점도 한 몫 할 것이라는 뇌피셜을 근거 없이 던져본다. 합정지구 웹사이트
주말에만 열어요 : 위켄드
북적이는 영등포역, 고급스러운 타임스퀘어, 사창가가 뒤섞여 기이한 풍경을 이루고 있는 영등포의 대로변에 <위켄드>가 있다. 말 그대로 주말에만 열어서 <위켄드>이다. 내가 방문한 날에는 위켄드의 프로젝트 스페이스 <2/W>에서 ‘회화 프로젝트 : 로비 머디 카펫’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추상화를 모아놓은 전시이기도 했지만, 거친 공간의 특성상 천장의 어떤 틈새까지도 작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미술관에서는 쉽사리 느낄 수 없는 풍경이다.
<위켄드>는 2017년에 제니조 작가와 최정윤 큐레이터가 공동설립한 공간으로 국내외 신진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2018년부터 위켄드는 하나의 고정된 디렉터쉽이 아닌 다양한 참여작가와 기획자가 공동 운영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동시대 미술의 은밀한 체험을 원한다면, 실험적인 젊은 작가의 작품에 끌리는 사람이라면 이 공간을 추천하고 싶다. 위켄드 웹사이트
타이틀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