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읽은 책을 또 읽는 일이 많았는데, 요새는 딱 한 번씩만 읽는다. 시간 여유가 많지 않은데 읽고 싶은 책은 널렸으니, 한 권 다 읽으면 잽싸게 다음 책으로, 또 다음 책으로 도장깨기를 하듯 계속 넘어가게 된다. 어른이 된 이후에 두 번 이상 읽은 책은 "Tuesdays with Morrie", "The Alchemist", "Harry Potter series" 정도밖에 없다. 사실 더 있을 것 같긴 한데, 당장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끔은 읽고 싶은 책 리스트가 너무 길어 지구 한 바퀴를 돌 지경인데도 이미 읽었던 책을 또 읽고 싶을 때가 있다. 내 경우엔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이 그런 책이다.
출처: 교보문고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책이 너무 읽고 싶었던 나는 집에 책이 많다는 한 친구에게 아무거라도 좋으니 한 권만 빌려달라고 했다. 다음 날 친구가 들고 온 책을 보고 나는 내심 실망했다. 제목이 전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이라니. 하지만 별 기대 없이 펼쳤던 책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나는 책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신부님과 공산주의자 읍장, 예수님. 등장인물부터가 남다른 이 책은 낯선 이탈리아 이름 때문에 처음엔 읽기를 주저하게 만들지만, 몇 페이지만 넘어가면 그 이야기 속에 폭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다 읽고 나면 신부님과 뺴뽀네 읍장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대신 책이라도 꼭 안아주고 싶을 정도다. 읽는 동안 낄낄거리게 만드는 유머는 또 어떤가!
친구에게 다시 책을 돌려줬을 때(나는 빌린 책은 반드시 돌려준다. ^^;) 무척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아, 또 보고 싶어서 어쩌지?
그 후 한참을 그 책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대학에 가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다. 이번엔 원서로.
대학 때 나는 공강 시간이면 도서관 서가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곤 했다.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이 없더라도 서가를 산책(!)하면서 좋은 책이 눈에 띄면 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슬슬 영어공부에 시동을 걸면서 원서 소설을 읽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대학 도서관 내에도 영어 소설이 있다는 걸 발견한 나는 가끔씩 영어소설이 있는 서가를 뒤지곤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 책을 다시 만났다.
Source: Goodreads
The Little World of Don Camillo
물론 원래는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노 과레스키가 쓴 작품이니, 영어로 된 것도 번역본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내가 좋아하던 작품을, 그것도 영어로 만났는데!!
당시는 내 영어실력이 지금보다 낮았음에도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전철에서 읽다가 실실거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조건은 1. 비문이 없을 것, 2. 흐름이 자연스러울 것, 3. 유머가 있을 것인데, 이 조건들에 딱 맞는 책이 바로 The Little World of Don Camillo였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우울한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다. 어두운 미래 세계에서 헤매다 보니 문득 예전에 읽었던 유머 가득한 이 책이 몹시 읽고 싶어 졌다.
십 대 때 한글로, 이십 대 때 영어로. 두 번 모두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책.
이제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다시 읽어보면 어떤 느낌일까? 아무래도 이번 겨울엔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