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없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천성이 게으른지라 집에서 각을 잡고 읽지는 않았고, 대중교통을 타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틈틈이 읽었습니다. 저자는 호모 속의 인류(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호모 네안데르탈시스)가 공존했던 시절부터 역사시대를 지나 미래에 예상되는 인류의 미래까지 서술해나갑니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 즉 현생인류가 지구 먹이사슬의 지배자가 되었고 문명 발전을 이룬 이유는 호모 사피엔스가 '가상의 실재'라는 개념을 생각해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가상의 실재'라는 개념은 국가, 민족, 법인, 기업, 주식, 종교와 같지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집단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가상의 실재'로 인해 인류가 강력하게 결속할 수 있었고, 인지범위를 넘어서서 대규모로 협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 동안 세가지의 혁명('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인지혁명'은 인류가 '가상의 실재'를 생각해내게 된 순간이고, '농업혁명'은 말 그대로 인류가 농사를 짓게 된 때, '과학혁명'은 인류가 과학을 통해 막대한 능력을 가지게 된 순간을 말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큰 틀을 잡고 인류의 역사를 (비교적) 간략하게 서술해나갑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는 대충 이정도로 서술하고 넘어가도록 합니다.
저는 이 책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첫 번째로 서술이 간단하고 명료하다는 점입니다. 한국 서적이든 외국 서적이든 인문학 책을 읽다보면 용어와 문체를 아주 꼬아놓아 놓은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꼬아놓은 글을 매우 싫어합니다. 읽게 되어도 읽다보면 '느끼는 것이 있겠지'하며 꾸역꾸역 읽는 것이지, 꼬아놓은 글은 재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일부러 꼬아놓은 글을 보면 저자가 자신의 똑똑함을 과시하고 아무의미 없는 소리로 밥을 벌어먹으려 이렇게 글을 썼나 생각도 듭니다. 그런 면에서 '사피엔스'란 책은 간단명료하게 쓰여져서 글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습니다.
둘째로, 저자가 과학기술에 대한 높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인문학은 어느 정도 '개소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 또는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인문학을 절대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너무 표현이 과격했네요^^) 하지만 그 '개소리'도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신문이나 책을 보면, 정치가나 작가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대학교 1학년 수준의 과학교양 정도만 공부했어도, 이 정도의 무지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그마저 공부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라고 꺼드럭 거리는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이런 면에서 다른 인문학자들보다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말 그대로 진짜 과학적 연구결과 (양자역학으로 인해서 어쩌고 저쩌고하는 약을 파는 것과 같은 사이비 주장이 아니라)와 역사적 사례를 가져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갑니다. 또한,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그 중요성을 잘 파악해나갑니다.
읽으면서 저자의 식견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통섭'과 '융합'이란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이 정도는 되어야 '융합'을 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긴 합니다. 첫째로, 제국에 대한 저자의 시선이 조금은 불편했습니다. 저자가 제국주의 시절 제국의 긍정적인 역할을 논하는 대목에저 저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생각났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한국인인지라 제국에 대한 저자의 시선에 심정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식근론이 아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예 맞다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읽는 동안 불편했습니다. (제가 미국인이거나 영국인이면 입장이 달라지겠지만...)
두 번째로,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어 정도를 넘은 확신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기술(생명과학기술, 로보틱스, 컴퓨터 기술)로 인해 인류가 영생하게 될 수 있을 거라 예측합니다. 물론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저는 그게 실현될 지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한 상태입니다. 10년 뒤에 무슨 기술이 나올지도 예측을 못하는데 어떻게 기술로 인한 영생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저 같이 간결한 서술을 좋아하신다거나 인류의 역사에 대한 거시적인 세계관이 궁금하시다면 이 책을 한 번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렇지 않으신 분들에게도 물론 추천드립니다.
글을 쓰다보니 제 공격성이 다소 표출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굴 비하하거나 무시할 의도는 없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