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미루는 습관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태어날 때부터인지 그렇게 자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습관은 만성적이다.
해야 할 일을 미룬 적은 많지 않다.
어렸을 땐 모든 일을 미뤄왔지만, 언제부턴가해야 할 일은 미루지 않게 됐다.
공적인 일을 미루지 않으면서 나의 미루기 병은 점점 더 사적이게 변했고, 더 내밀해졌다.
그것은 미루기보다는 방치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워지는 병이었다.
가장 오래전 미루기를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비디오방에서 빌렸던 짱구 비디오테이프가 떠오른다.
연체료가 얼마였는지, 얼마나 오래 반납을 미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반납을 제때 못하면 연체료를 내야 한다는것과 내가 꽤 오랜 기간 반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날들이 계속 쌓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미루기 병의 특징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기에 더욱더 미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엔 그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공포가 된다.
어린 시절 나에게 비디오 플레이어 안에 들어있는 짱구 비디오테이프는 공포 그 자체였고, 시도 때도 불현듯 찾아와 나를 괴롭히던 악몽이었다.
비디오 연체의 말로는 생각보다 허망했다.
끝없이 미뤄오던 중에 우리 집이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 테이프를 반납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연락 두절 상태(이른바 먹튀)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만약 몇만 원의 연체료를 내고, 엄마에게 호되게 혼났더라면 이 미루기 병은 쉽게 고쳐졌을까?
내 미루기 병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이 커지지만, 그 두려움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하루의 연체료는 얼마이고, 며칠을 밀렸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연체료의 액수가 얼마라는 걸 알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두려움에 떨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도 나는 치과 진료를 미루고 있고, 사자마자 맡겨 놓은 물건을 찾으러 가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이미 너무 시간이 흘러 나를 기억할까? 라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
이 지긋지긋한 병을 언젠간 떠나올 수 있을까?
이미 이 습성은 나란 인간에게 너무나 결합해 있어 영영 떼 놓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