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팠다. 감기에 잘 안걸리는 체질인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체력이 떨어져서인지 조금 추웠는지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 매일 약을 먹었는데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식욕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트레스를 받아 몸이 버티지 못했던 것 같다.
스팀잇에 현실의 투정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이곳도 결국 또 내 삶의 복사본이 될 게 뻔하니깐. 굳이 그런 우울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몸이 많이 회복했고 다시 내 삶은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완연하지 않지만 아마도 곧.. 그러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아무 일도 없는 척 스팀잇을 적어내려갈 수가 없다. 뭐.. 이게 나다..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도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더라도 그날의 일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며칠 전 그 일이 벌어진 건 내가 예민해서 일수도 있다. 목이 아팠고 밀려드는 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막 생리가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었으니깐. 조금 더 체력관리가 되어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까?
나는 한 달에 한 번 계산서 발행을 한다. 원래 이 일은 내 일이 아니었지만 사정상 내가 하게 되었다. 성격이 그다지 꼼꼼한 편이 아닌데다가 아무래도 숫자인지라 이 작업을 할 때면 꽤나 집중을 한다. 실수를 하고 싶지 않고 수정을 하기에도 골치아 아프니깐 한 번에 끝내고 싶다. 보통 2시간 30분에서 3시간 30분 사이로 소요되는 일이다.
분명 처음 이 일이 내게 넘어올 때만 해도 그건 부탁에 가까웠다. 나는 일을 맡는 대신 원래 정신없이 방해받고 처리해야하는 자잘한 업무는 이 일을 할때만큼은 미뤄두고 싶다고 말해두었다. 집중하고 싶으니 양해해달라는 말을 했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분명 그랬고 그들도 동의를 했다.
이 회사는 가족회사다. 위 직급 3명은 가족이다.(대표, 부장, 차장) 그 외 나를 포함한 4명은 가족이 아닌 일반 직원이다. 나는 애석하지만 차장과 주로 일을 한다. 차장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내가 고용되었다고 생각한다. 물건을 주문하고 주문을 받는 과정에서 영어나 스페인어(이상하게도 쓰기 업무는 나를 시킨다.)로 의사소통을 하는 역할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서류 업무가 주로 내 업무다.
차장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회사에서 가장 많은 매출이 발생하는 주요 업무를 그가 총괄하는 게 이 회사의 비극이다. 그는 숫자에 약하고 기억력도 좋지 않으면서 딱히 메모하는 습관은 없고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얼마전에는 1년 내내 판매금액을 낮게 책정해서 A라는 물건을 팔아온 사실이 밝혀졌지기도 했고 2월 세금계산서가 천 만원 가까이 한 업체에 발행이 되지 않은 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책임지거나 사과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와 매출처 담당 일을 하는 대리님이 '너무 바쁜 그가 실수할 부분도 미처 챙기지 못한 탓'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그는 내 기준에서 불성실하다. 매일 10-15분씩 늦으며 업무시간에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고 항상 일을 미루기 때문이다..나는 모든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여유를 갖고 싶지만 나의 일의 70%는 그와 연관이 있고 그의 결정이나 말에 따라 (내 의도와 머리와 상관없이) 결정되기 때문에 나는 매번 일을 미뤄서 처리해야 만한다. 그 점도 상당히 성가시다. 나의 페이스라는 게 없고 그의 페이스는 확실히 못마땅하다.
분명 그의 직급은 하늘과 같은 차장이고 나는 일개 '사원'에 불과하지만 너무나 바쁜 그에게 나는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챙겨줘야 했고 그의 실수는 그를 잘 보좌하지 못한 나의 실수가 되었다. 그마저도 가끔 보채는 것 또한 허락되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온통 불만이 쌓여있긴 하고 그가 차장이든 사장이든 일에 관련되서 그는 내게 나쁜 사람이다. 그리고 전혀 일말의 존경심 같은 건 없다. 그냥 무시하고 있을 따름이지.
어쨌든 실수를 잡아낸 이후 처음 발행하는 계산서 작업이라 내게 일을 넘겨준 다른 대리님도 평소보다 훨씬 꼼꼼히 체크했다. 사실 그 전날까지 차장이 모든 금액관련 상황을 넘겨주기로 저번주 회의시간에 협의된 사항이었지만 그는 기한 내에 역시나 일을 끝마치지 못했다. 부장은 또 다시 다른 사람에게 왜 받아내지 못했냐는 질책을 했을 뿐이다.
보통 오전에 넘어올 세금계산서가 오후 2시 반이 넘어서야 내게 주어졌다. 나는 그 날 해야할 일도 하지 못했고 그 일을 집중해서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그 중간에 부장님이 몇 번 말을 걸었다. 물론 내 기준에서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었고 말 시키는 것 자체가 짜증도 났다. 대충 듣는등 마는둥 하긴 했다. 부장은 기분이 상했는지 내게 말했다.
"OO씨 바쁜 건 알겠는데 얼굴 좀 보고 얘기하지."
그제서야 나는 일을 멈추고 부장자리로 가서 얘기를 들었다. 역시 별로 지금 할 얘기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건 그 일 뿐이다. 부장의 말을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것.
나는 계속 작업을 하고 있었고 내 귀 한 쪽에는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평소에도 나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곤 했다. 진짜 음악을 들으려는 건 아니고 주변 소리에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부장이 차장과 가족이 아닌 다른 2명의 사원에게 다음주 스케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일도 차장이 교통 벌점을 너무 많이 받아서 벌점을 상쇄하기 위해 교육을 가야겠고 업무 공백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에 관한 설명이었다.) 말이 끝나고 나서 작업하고 있던 내게 말했다.
"OO씨 지금 무슨 얘기 하는지 들었지?"
"네??"
"이거 OO씨도 알아야 할 내용이니깐 들었어야지."
"저... OO를 OO씨가 처리하니 그거 받아서 제가 처리해야한다고 하는 내용은 들었는데 다른 내용은 못 들었는데 들어야만 했나요?"
"아 그럼 제가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아. 네."
그리고 난 다시 이어폰을 꼽고 계산서 작업을 했다. 내가 이 회사에서 가장 어이가 없는 요구는 모든 말에 귀를 열고 있으라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 말든 나를 부르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모든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항상 귀를 열어둬라.
그러자 갑자기 차장이 매우 화가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하는 거야!! 부장님 말씀하시는데 이어폰 꼽고 이게 회사야?"
나는 화가났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차장이 그렇게 말할 자격은 없었는데 굉장히 무언가가 잘못된 얼굴로 화낼 자격도 없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게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금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처음부터 들으라고 말씀하셨으면 당연히 들었을 거에요! 오늘 다른 날도 아니고 계산서 작업 하느라 바빠서 못 들었어요. 이어폰은 집중하려고 꽂은거고 연주곡 나오고 있었고 이거 때문에 못 들은 거 아니에요."
그러자 차장이 말을 멈추고 부장은 곤란한듯한 얼굴로 말했다.
"자자. 앞으로 말할 땐 집중좀 해서 듣자. 말하는 데 등 돌리고 있으면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니깐."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건의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앞으로 꼭 들어야 할 이야기는 처음부터 들어야 한다고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놓칠 수도 있고 들리지 않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들어야 한다고 말씀해주시면 못 듣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상황은 일단락했다. 내 목소리가 침착하지 않았던 건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저 말이 여전히 그렇게 잘못되고 말도 안되는 요구였고 그렇게 예의가 없는 몰상식한 행위였는지 여전히 인정할 수 없다.
그 일이 있고 씩씩 되면서 집으로 갔다. 차장은 문맥에 상관없이 그 상황만 보고 화를 내는 때가 많았고 나는 그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회의 시간이었다. 회의는 평소대로 끝이 났고 내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 사원직급인 나와 다른 남자분을 제외하고 직급이 있는 사람끼리 따로 무슨 말을 오래도록 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실제로 일이 벌어지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회의가 끝나고 있었던 또 다른 회의에 참여했던 과장님과 식사를 했다. 그리고 과장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다. 혹시 제 얘기하신건가요?
맞았다. 내 얘기를 했단다. 요지는 '너네가 관리를 못하니 하늘같은 부장에게 사원 나부랭이가 말대답이나 하고 있지. 부장의 권위를 매우 실추시켰고 이건 회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도 였다. 나는 너무 충격에 빠져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화가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해서 밥먹는 과장님을 앞에두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특히 차장과 이사는 분개하며 이렇게 회사가 잘 해주고 편안하게 해주면 고마운줄 알아야지 기어오른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내가 충격을 받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무얼 그렇게 잘못한 지 모르겠는데 내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했기에 심지어 나를 불러서도 아니고 뒷담화하는 형식으로 다른 사람을 질책하는 용도로 내가 그들에게 소모되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날 아프다는 핑계로 반차를 내고 집으로 가서 하루종일 울었다.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하나 회의감이 났다. 더 슬픈 건 자신감있게 회사를 나올 수 없는 나의 처지였다. 그리고 다음날 안갈 수 없어 회사에 나갔다. 나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왠일로 먼저 아프면 집에가서 쉬라고 했다. 그래서 반차를 내고 주말을 겪고보니 감정이 좀 사그러들었다.
이 회사를 얼마나 다닐지 모르겠으나 아무 준비없이 나갈 수 없는 노릇이다. 한 가지 코믹한 건 그들이 늘 '소통'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반박 반대의견은 들을 준비도 마음도 없으면서 늘 소통을 입에 달고 산다. 그 말이 정말 싫다. 그들이 권위를 중시하는 점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나는 그 일이 그렇게 그들의 권위를 짓밟고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인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앞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감정을 쓰지 않고 로봇처럼 그저 돈을 주니 회사에 다니기로 일단 결심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으면 굶어 죽더라도 나와버릴 것 같지만...
난 여전히 내가 뭘 그렇게 크게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내 입을 막았으니 어쨌든 그들 입장에서 성공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