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평화로운 스팀잇 바다 대문은 님께 선물받았어요!
스물아홉이 되기 전까지 스키장에 가본 적 없었다.
가 볼 기회가 없었다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누군가 적극적으로 날 스키장에 끌고 갔다면 한 번쯤 못 이긴척 갔을 지도 모른다. 그 이전까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와 스키장에 가고자 한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애초에 스키장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릴 때는 그다지 내가 운동을 못한다는 자각이 없었는데 커가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운동보다 잘 할 수 없는 운동이 몇 배로 많다는 냉정한 현실이다. 나는 특히 공을 다루는 운동에 소질이 없었다. 바보인가 싶을 정도로. 장난 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흉물스러운 동작을 선보이곤 했다.
헬스장의 친절하던 스쿼트 강사는 30분쯤 나를 가르치다가 포기했다. '회원님 죄송합니다.' 민망한 얼굴로 나는 스쿼트장을 빠져나왔다. '괜찮아요. 강사님 탓이 아닌걸요.' 이 말은 부끄러워 접어두었다.
또한 유연성이 필요한 수영도 내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열흘쯤 배우다 소독물을 마시며 다음날을 걱정하는 나를 발견하며 포기했다. 그나마 내가 잘했던 운동은 달리기, 멀리뛰기, 뜀틀 이런 종류였다. 물론 어릴 적 일이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산책만 좋아할 뿐이다. 그냥 걷는 게 좋을 뿐이다.
나는 스키를 잘 탈 수 있을까?
궁금하긴 했다. 일단 스키는 공놀이는 아니고 몸으로 하는 일이니 그리 못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예로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 같은 건 탈 수 있으니깐. 나는 스릴을 좋아한다. 무언가 타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스키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피어오르곤 했다.
내 안의 부정적인 악마는 말했다.
너는 힘을 빼야 하는 모든 운동을 못해! 긴장감이 가득한 그 몸으로 자연스럽게 스키를 탈 수 없을 거다. 스키는 균형이란 말씀이지. 구기처럼 너는 스키 잼병일거다.
나는 그 악마에게 겸연쩍게 말했다.
나, 썰매는 참 좋아하는 데 .. 넘어지는 건 두렵지 않아.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는 평화주의자다.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좀처럼 걸려들지 않는 온화한 사람이라고나 할까. 나는 처음에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데이터 경험이 부족한 AI를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나에 비하면 그는 감정의 변화도 반응도 없고 심지어 개인적 선호 같은 게 없었다. 어떤 걸 좋아하냐는 질문에.. AI스피커처럼 '글쎄.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하고는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다.
그런 남자친구가 유일하게 드러낸 자신의 선호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고기였고 다른 하나는 스키였다. 남자친구의 유일한 취미는 스키였다. 드디어 내 인생에 스키란 녀석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게 되는 구나.
매일 내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해주는 남자친구가 유일하게 처음으로 스키장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난 차마 그에게 '난 스키를 타 본 적이 없어. 스키장에 갈 생각이 없는 걸.'이라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 스키장에 가 본 적 없는걸? 거기 가면 네가 가르쳐 주는 거야?
-물론. 처음인 사람도 몇 번 해보면 잘 타던걸. 나만 믿어.
-아.... 원래 운전 같은 건 애인한테 배우는 게 아니잖아.
-에이. 아니야. 재밌을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 OO, 잘 할 수 있어!
-아... 화내면 안돼. 엄청 못타도 화내면 안 돼.
그렇게 나는 29년 생전 처음으로 스키장에 갔다.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날은 토요일 낮, 사람이 잔뜩 있었다. 방학을 맞아 스키캠프에 온 어린이도 잔뜩 있었고 슬로프마다 사람이 가득 찼다. 아.. 불길하다.
스키복도 장비도 모두 대여했다. 처음 스키를 신은 그 느낌은 매우 아팠다.. 아..아프다... 신발만 신었는데도 아팠다. 내 발이 매우 자유분방하게 생기긴했다. 발등도 높고 발 볼도 넓다. 아아. 원래 이런 건가. 알 수가 없다. 남친은 발이 움직이면 안 되고 원래 꽉 잡아주는 거란다. 그..그렇군..
아 땅에서 걷는 스키 신발의 감촉. 정말 별로다. 무겁고 둔하다. 땅을 때리며 걷는 기분이다. 발에 온통 수갑을 달아놓은 기분이다. 벌받는 기분이란 말이지. 불만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남친을 따라 왕초보 코스로 이동했다.
드디어 스키 플레이트에 신발을 장착했다. 그것도 엄청 용을 쓰며 겨우 장착했다. 아.. 발의 자유를 빼앗겼다. 내 발 내 몸 안녕. 그때부터 나의 몸은 나의 자제력을 잃었다. 이건 누구의 발인가. 대체 땅은 어떻게 걷는 거였지.. 어 분명 난 앞으로 발을 내딛었는데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그동안 내가 걸었던 걸음은 뭐란 말인가.
어찌어찌 아주 완만한 경사의 슬로프까지 올라갔다. 기본 자세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넘어지는 법과 멈추는 법을 배웠다. 역시 내 남자친구는 친절했다. 답답했을텐데 몇 번이고 내게 자세히 스키의 기본을 알려준다.
내 옆으로 끊임없이 사람이 지나갔다. 한 눈에 봐도 부드럽고 유연한 뼈를 가진 어리고 생기발랄한 아이들이 나를 마구 지나쳐갔다. 아주 쪼그마한 아이도 스키를 타고 부드럽게 내려갔다. 아.. 이 부러움은 뭐지.
왕초보 코스에서 2 번 정도 내 몸이 아닌채로 슬로프를 내려왔다. 경사가 완만해서 속도가 빠르진 않았다.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 몸에 힘을 잔뜩 주었고 기적적으로 넘어지진 않았다. 내 옆으로 사람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식은 땀이 흘렀다. 빨리 다음 진도를 나가고 싶었던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남자친구의 칭찬이 이어진다.
-와우 우리 OO 잘하는데? 바로 초급 코스로 가도 되겠는 걸.
-응? 그래도 돼?
-응 괜찮을 것 같아. 초급 코스라서 경사도 지금이랑 크게 차이 없어.
그렇게 용기를 내서 리프트를 탔다.. 아.. 리프트... 무섭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정신차리라는 계시가 아닐까. 나는 덜덜 떨며 굳이 아래 풍경을 감상한다. 아. 무섭다. 시선마저 통제되지 않는다. 리프트도 무서웠는데 그 다음 공포가 바로 이어진다. 그 리프트에서 스키를 장착한 채 무사히 내려야 한다는 엄청난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는 사람이 가득하고 뒤에도 사람이 가득하고
남자친구는 자상한 얼굴로 그냥 무릎을 굽히고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면 된다는 암호같은 조언을 해준다..
아 하필 내앞에는 나같은 스키 초보가 가로 막고 있었다. 긴장이 된 나는 리프트에서 내리자마자 보기 좋게 앞으로 자빠졌다. 아... 아프다.. 아픔보다 창피하다. 안전요원이 리프트를 멈췄다. 가뜩이나 리프트 줄도 긴데 리프트 정체를 악화시키는 범인이 나로구나.
남자친구는 부드럽게 날 위로했다. 처음에는 다 그럴 수 있다고 다음엔 잘 할 거라고.
아.. 악마다. 악마.. 친절한 악마다. 스키장 악마.. 내 말문을 틀어막는 웃는 모습의 악마다.
그렇게 내 첫 정식 슬로프 체험이 불안하게 이어진다. 슬로프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나는 제어안되는 몸으로 사람 많은 곳을 내려야 하는 내 처지에 공포와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다행히 친절한 악마는 아주 조심히 앞에서 날 받쳐주면서 서서히 내려갔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아주 서서히 슬로프를 내려왔다. 가끔씩 '어어어엇 어버버버버버' 두려움에 가득찬 소리를 내면서 무사히 첫 슬로프 경험이 끝났다.
내 남자친구는 생각보다 잘 탄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바로 두 번째 리프트.. 간신히 넘어지진 않았는데 방향 제어가 안 돼 저 멀리 엉뚱한 곳에 착지한 나를 역시 남자친구가 끌어줬다.
두 번 째 슬로프 체험.. 여전히 긴장이 되었다. 조심조심 사력을 다해 온 몸에 힘을 주며 이것이 스키일까 싶은 자세로 엉거주춤 폼 안나게 내려가고 있었다. 1분이 지나지 않았을 때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다.
어억!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나를 뒤에서 박아버린다. 나는 뒤로 엎어졌다. 그 분은 미안하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미처 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친절한 남친은 저 멀리 분리된 나의 플레이트를 주섬주섬 주워왔다.
문제는 플레이트에 신발이 장착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아깐 들어가던 신발이 장착이 안 된다. 위에서는 끊임없이 사람이 내려오고 신발은 껴지질 않고. 멘붕 상황에 돌입한다.
-신발이 안 들어가..
-아냐 다시 침착하게 해 봐.
-진짜야. 진짜 안 들어가..
몇 번이나 끼어봐도 헛수고였다. 땀이 볼을 타고 내린다.
-좀 가장자리로 옮겨서 해보면 안돼? 자꾸 사람이 와서 무서워.
-안돼!!!!!! 여기서 껴!!! 옆으로 못 가!! 여기서 끼어야 된다고!!!
내가 답답했는지 순간 남자친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실 적고 나니 육두문자 하나 없는 그저 조금 큰 소리에 불과한데 나는 그 순간 왜 그토록 서러웠을까. 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진짜 안껴진단 말이야.. 나도 끼고 싶단 말이야..
그 때까지 내 남자친구는 내게 큰 소리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그와 싸운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엎어진 것도 서러운데! 내 잘못도 아닌데. 사람 많아서 무서운데.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데.' 멘붕 상태억울함과 서러움을 담아 나의 눈물샘은 터져버렸다. 가장 자리에 앉아 나는 엉엉 울었고 남자친구는 엄청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어쨌든 그 망할놈의 슬로프를 내려가야 했기에 울음이 그치자마자 플레이트에 신발을 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원래 이렇게 어려운건가? 신발에 눈이 박혀서 안들어가는 거란다. 무사히 다시 스키를 장착하고 어찌저찌 공포의 슬로프를 내려갔다.
나는 스키 절연 선언을 했다. 스키가 너무 무서웠다. 남친은 예의 착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돌아와 내게 죽을 죄를 줬다며 커피를 사다 바쳤다. (.. 그란데 사이즈 라떼로 부탁한다 이놈.) 어쨌든 놀러온거니 남친에겐 혼자서 나 없이 마음껏 스키를 즐기고 오라고 했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난 스키를 못 타는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