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정신이 없다. 할 일이 많아져서 바쁘다기보다는 불확실하고 평소 해보지 않은 영역에 관심을 두어야 해서 낯설고 미숙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엉켜버린 기분이다. 자주 회로가 멈추는 로봇처럼 작동이 안 될 때가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볼까 생각해봐도 잘 되지 않는다. 기분상 실타래가 얽혀버린 느낌이지 사실 풀어야 할 실타래도 크게 없다.
딱 선택의 순간까지는 불확실한 영역에 대해서 걱정하지도 신경 쓰지도 말자며 다짐해보지만 정신을 놓고 있으면 효율적이지도 못할 고민을 또 하고 있다.
자취 생활을 꽤나 오래 했지만 집을 갖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물론 내 집은 아니지만...)
원룸이 아닌 아파트에서 다른 누군가와 살림살이를 마련해서 살아야 하는 건 각오는 했지만 정말 까다롭고 복잡한 일이다. 돈이 많으면 조금 쉬워지려나?
처음 운 좋게 그 집을 들어가게 돼서 정말 기뻤지만, 집을 보자마자 이 집을 어떻게 고쳐 써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우리 집이 아니라 공사할 수 있는 범위도 예산 범위도 제약이 생긴다)
4월 첫 주 집 구경, 고민 그리고 또 고민, 징글징글했던 체리색 갈매기 몰드 뜯기
4월 둘째 주, 공사 동의서 받기, 엘리베이터 보양작업, 조명 분리, 다용도실 페인트 칠하기, 곰팡이 제거, 바닥, 장판 고르기, 시트지 제거 / 침대 구매
4월 셋째 주, 마루 철거, 장판, 바닥 시공 / 가전 구매, 가구 1차 구매
다음 주에는 인터넷 설치, 전등 및 스위치 설치, 인테리어 필름 작업 등등
위의 열거된 작업 중 80% 이상은 남자 친구가 수고하고 있다. 불쌍한 집요정님. 나는 남자 친구가 정해놓은 상황을 같이 고민하고 실질적으로 주말에만 신경을 쓴다면 남친은 실제적으로 모든 일을 실행해야 하고 신경을 다섯 배는 더 쓰고 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빠지고 있다.. 나는 먹는 대로 찌던데 미안.
당장 이사를 가야 할 것도 아니라 시간 여유가 꽤 있어 보이는데도 하다 보면 쉬엄쉬엄 해보려고 해도 신경 쓸게 많다.
요새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카드값이 많이 나오고 있다. 와우- 신세계! 그만두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농담을 하고 있다.
나는 쇼핑을 즐기진 않는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엄밀히 들어가면 아예 쇼핑을 즐기지 않는 건 아니다.
가끔씩 필요한 마음에 드는 제품을 사게 되면 너무너무 기쁘다. 시간을 들여 원하는 아이템을 탐색하는 것도 즐겁다.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던 제품을 한꺼번에 사야 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평소 인테리어나 가전, 가구에 관심 있던 사람에게 이런 기회가 오면 얼마나 즐거울까 생각해봐도 역시 지금은 내 상황이 벅차다.
결혼식에 대해선 전혀 로망이 없어 모든 게 다 귀찮고 최대한 에너지 안 들이고 마구 진행하고 있지만 또 예쁜 집에 대한 로망은 있다.
달리 집순이가 아닌 데다가 작은 원룸에 사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큰 집에 산다고 생각하니 설렌다고 해야 하나.
완전히 다 마음에 들게 꾸밀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실감하며 마구 타협하게 되겠지만.
기쁨과 설렘과 귀찮음과 체념 사이를 오가며 하루 종일 쇼핑을 하다 보면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다.
그런데 또 구매에 있어서 오히려 남자 친구보다는 내가 선택을 빨리하는 편이기 때문에 다 결정하고 있다.
그리고 한 번 사고 나면 크게 후회를 하거나 찾아보지 않고 만족하는 성격이라 또 이런 점은 장점이다.
예산이라는 건 초과하면 초과했지 넉넉하진 않고
초보인지라 이렇게 하면 될 거야라는 많은 부분이 그렇지 못하고 다른 방법을 우회해야 할 때가 생긴다.
이런 경험이 모이면 다음번엔 더 잘하겠지라고 막연히 서로 위로하고 있다.
다른 일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다. 찬찬히 나의 시간을 보낸 게 언젠 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주말보다 평일이 더 편안한 이 기분... 월요일이 되어야 좀 쉴 수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회사도 곧 그만두고 새로운 사람이 와서 인수인계를 해야 하고 하필 타이밍 안 좋게도 내가 나가기 전에 갑자기 회사는 상호를 바꾸고 컴퓨터 포맷을 하고 외국업체에 선물을 보낼 거라고 한다.. 왜 갑자기 뭐때문에라고 따질 수도 없고.. 마지막 날까지 쉽지 않을 것 같다. 여기도 불확실하고 해결해야 할 이슈가 꽤 있지만 일단 지금은 집이 더 큰 고민거리다. 그 와중에 틈틈이 엄마와 전화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마음 상하고 있다. 엄마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말 전화하고 싶지 않은데 오늘 또 전화해야겠네.
이런 와중에도 반가움이 여기저기서 날아온다.
지쳐서 둥글게 말린 어깨를 보며 우편함에서 발견한 수크레에서 온 '춘자'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눈에 딱 들어온 기분 좋은 선물 레일라 님의 '파리가수’
6개월 만에 연락이 닿아 만나기로 한 전 직장 언니와의 약속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처럼 아예 시간이 없거나 빡빡한 건 아니다.
역시 머리가 어지러울 뿐이지.
남는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기쁨과 에너지가 넘치는 시간으로 만들어봐야겠다.
너무 걱정 말고 너무 골치 아파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