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가장 잘 써지는 시간과 장소
지난 직장을 다닐 때 시간만 나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적으면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네 번까지도. 나의 유일한 낙은 영화관에 가서 어둠 속에서 영화를 마음 편히 보고 영화에 대해 감상을 누군가와 나누는 행위였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고 여유로운 시간이 차고 넘칠 때 정작 영화를 보지 않게 된다. 청개구리 같은 마음이다.
최근 스팀잇에 글을 쓰며 느낀 건 의외로 내가 글을 쓰기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회사란 점이다. 회사는 물론 글을 쓰라고 있는 장소도 아니며 그다지 글을 쓰기에 적합한 장소도 아니다. 노란빛이 도는 밝기가 왔다갔다 하는 오래된 모니터와 걸핏하면 멈추는 컴퓨터, 게다가 불법 윈도우는 내게 늘 정품을 사라 경고한다. 내 모니터는 사방에서 감시받는 비인간적 판옵티콘 설계의 중앙자리, 허튼 짓을 해서 좋을 게 없다.
어르신들이 자리에 계실 때는 글을 전혀 쓸 수 없다. 일단은 업무시간에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는 금지된 행위니깐 말이다. 글을 쓰다가도 전화나 메일로 방해를 받기도 한다. 삼십분쯤 도둑글을 쓰다가 멈춰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면 미친듯이 다음 문장을 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마치 대단한 예술 작품을 완성해나가던 문호라도 된 기분 아니면 비밀연애를 하는 사람처럼 불타오른다고 해야하나.
쿠바노 시리즈의 목차는 회사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시리즈의 반을 회사에서 몰래 적어내려갔다. 가끔 1~2시간씩 웃어른들이 자리를 비우는 평화로운 시간이 오곤 한다. 바쁘지 않으면 나는 일을 후다닥 끝낸 후 다신 없을 그 시간 집중해서 글을 쓴다. 내 머릿속에서 맴돌던 생각은 신기하게도 점점 하나의 글로 완성되어 갔다. 그 시간은 놀랍도록 밀도가 높고 내게 의미 있다.
그런 면에서는 참 내게 좋은 직장이다. 일을 하며 창의적으로 생산적으로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덕분에남는 모든 시간에 꽉 채워진 에너지로 글을 쓸 수 있다. 지난 직장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역시 막상 시간이 무한하게 주어지면 나는 또 글쓰기를 외면하고 다른 놀이를 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글 쓰는 게 좋다. 특히 쓰지 말아야 할 그 순간에 글 쓰는 맛이란. 스릴 넘친다. 이 글의 초안 또한 회사 텅빈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
P.S.틈새 일상 자랑
아침 출근길 길거리에 사람 하나 없고 지옥철이었던 2호선이 주말보다 한산했어요. 딱히 할 일도 없어 대충 일하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왠일인지 오후 2시 30분, 퇴근하라고 윤허해주신 덕분에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집안일도 좀 하고 나른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게 됐어요. 헤헷. 한 번 더 메리크리스마스입니다.
아 그리고 저 회사에서 친한 언니께서 손수 만든 수제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셨어요! 감동해버렸습니다. 아기자기한 게 너무 예뻐요. 정말 저와 다른 금손! 시간이 없어서 더 예쁘게 만들지 못했다는 말에 아니 대체 마음 먹고 만들었으면 어떤 작품을 만드실거냐고 감동의 판잔을 드렸지요. 팍팍한 회사지만 무슨 복이 있는지 하나같이 좋은 분들 뿐입니다. (가족제외 _) 덕분에 회사에서 숨쉬며 많이 웃어요. :D 스팀잇 와서 느는건 자랑뿐이군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