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의 팬이었던 적은 없다. 1:1로 대화를 나눌수도 관계를 발전시킬 수도 없는 대상에게 조건없이 애정과 사랑을 무한정 베풀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애초 가상의 인물이라 내 맘대로 관계가 재구성이 될 수 있어 흠뻑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일부 모습만 보여주곤 하는 실제 존재하는 사람에게 그다지 애정이 가지 않았다. (연기를 좋아하거나 노래를 좋아하는 건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얼굴이나 겉모습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기준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누구든 자기 눈에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아름다움에 끌리는 건 사람의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도 미녀/미남을 좋아한다는 실험도 있다. 오히려 당당히 '전 외모를 보는데요?' '잘생긴 남자가 좋아요.' '예쁘면 돼!'라는 사람들이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별개로 나는 외모에 현혹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잘생기거나 예쁘면 인물값한다.'는 식의 논리 때문은 아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관계 형성의 기회를 외모라는 이유로 제한해버리고 싶지 않다. 성급히 보이는 것에 의지해 한 사람을 판단하고 싶지도 않다. 물론, 연애나 결혼의 대상은 최소한 내 기준치를 넘어가는 남성적인 매력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정상적인 성생활이 가능하고 서로의 관계가 진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한정적인 관계를 제외하고 외모에 호불호를 평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막상 친해지면 첫인상이라건 아주 사소해지기 마련이고 외모는 보이지도 않게 된다. 키가 크든 작든 동양적인 이목구비든 서양적인 이목구비든 피부생활이 어떻든 나와 잘 맞고 좋은 사람이면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러던 어느 날 난 쿠바에 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쿠바는 미남, 미녀로 유명한 동네였다. 가기 전까지 맹세코 그 사실을 몰랐다. 거기서 만나 별일 다 겪으며 강제로 친해진 A는 구릿빛 피부의 정신없이 말려있는 파마머리를 하고 여행객 차림인 쿠바노답지 않는 특이한 녀석이다.
A는 웃으면 착해보이는 인상과 함께 무표정하면 엄청 무서워보이는 두 얼굴의 사나이었다. 탄탄한 몸과 균형잡힌 전체적인 모습은 분명 매력적이긴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항상 잘생겼다고 생각될만한 미남은 아니다.(미안) 그리고 내가 A와 친해진 건 그의 외모와는 별 관계 없다. 오히려 A를 알수록 A가 더 잘생겨보일만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게 훨씬 매력적인 사람이랄까.(더 미안)
어느날 A는 자기 친구 B와의 일화를 내게 들려준다.
아바나에서 함께 붙어다니며 길거리를 쏘다니던 친구녀석이 하나 있어. 그 녀석과 다니면 여행객들이 정말 말을 많이 걸어. 한 번은 유럽 여자 두명이 끈질기게 우릴 쫓아다니면서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재밌게 놀았지. 그리고 항상 사진 한 번만 찍자고 해. 절대 안된다고 해도 몇 번이나 애원해. 한 번도 찍어준 적은 없어. 그것도 모르고 끊임없이 뭘 사준다니깐.
그 얘기를 들을 땐 사진 한 번 찍어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순진한 관광객들을 놀리나 싶었다. A는 B를 만난지는 1년이 넘어가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두달 뒤 '바라코아'를 함께 여행가게 되었다. 바라코아 길거리를 쏘다니는데 그가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한 남자를 부등켜안았다. 거짓말처럼 우연히 B가 거기 있었다. 아니 그냥 A는
내 친구야! 인사해~
라고 말했을 뿐이지만 나는 그를 보는 순간 그가 B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B, B의 약혼자 그외 여럿 친구들과 바라코아 밤거리에서 음악을 들으며 술도 한 잔 마시며 어울렸다. 아주 낯선 경험이었다. 나는 버릇없이 누군가의 얼굴을 넋놓고 쳐다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B는 절대 내가 평소 좋아하던 스타일도 아니었는데 조금이라도 의식하지 않으면 나도 몰래 자꾸 얼굴을 넋놓고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는 전형적인 꽃미남 스타일로 실제 나이가 20대 중후반이지만 얼굴만보면 초반같았고 피부가 아주 하얗고 투명했다. 키는 적당히 컸고 얼굴은 적당히 작았고 보조개가 들어가는데 웃는 게 아주 이뻤다. 한국에 살았으면 아이돌이 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주 친절했고 상대방을 배려해주고 매너도 아주 좋았으며 한 여자에게 일편단심인 듯한 것 같다.(A의 증언에 의하면)
그에게 어떤 흑심도 없었고 약혼자분또한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성적인 생각을 비웃듯 나도 몰래 그의 얼굴을 감상하게 된다. 나는 가까스로 '참 잘생기셨네요!'라는 감탄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고 모든 인내심을 짜냈다. 다만 나중에 A에게 '혹시 저 친구가 B인 것 아냐?'라고 물어봤을 뿐이다. A는 매우 놀라며 '어떻게 알았어?'라고 되물었다. '그야 그의 얼굴이 말해주니깐..'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대신 '내가 눈치가 빠르잖아~'라고 은근슬쩍 넘어간다.
B 잘생기지 않았어? 여자들이 좋아하더라고
내 스타일은 아냐. 난 너 같은 스타일이 더 좋아.
그는 내 대답에 안심한듯 웃었던 것 같다.
A 미안해... 처음으로 네 얼굴이 잘생겨보이지 않았어. (이 때 A를 좋아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야.
그 날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바라코아에서 나는 A에 이끌려 가고 싶지도 않았던 허섭한 폭포로 놀러가야만 했다. 내 기분은 최악이었다. 물에 들어가 놀 생각도 깔깔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저멀리 혼자 앉아 화를 식히며 이미 놀러온 청춘남녀들을 늙은이처럼 관찰하고 있었다.
여자 네 명과 남자 세 명 정도가 폭포와 계곡에서 놀고 있었다. 나의 착 가라앉은 기분을 배반하듯 검은 전신수영복에 너무나도 섹시하고 내 스타일인데 그냥 너무 이쁜 여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저렇게 예뻐도 되는 걸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이상향(?)이었다. 심장이 마구 두근두근거렸다....
그녀는 흑발과 갈색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뭔가 동서양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융합해서 조각한 외모였다. 혼혈아가 확실하다.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나 과하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품격이 흘렀다. 그리고 몸매는 모델같았다. 큰 가슴과 긴 목 길쭉길쭉한 팔다리.. 남자 2명이 그녀에게 와서 장난을 치고 사진을 찍었다. 스토커로 보일지도 모르게 조금 먼 거리에서 여유롭게 그녀를 관찰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신기하게도 최악이었던 기분은 설렘으로 바뀌어버렸다.
나는 감히 말을 걸지도 못했다.무언가 너무 아름다운 그림을 구경하듯 현실감이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집에 가는 길 내가 물었다.
아까 그 여자 너무 예쁘지 않아?
응 귀엽더라. 하얗고 마르고 일본인 말하는거지?
응?????? 물론 그 일본인도 귀엽고 예쁘고 하얗고 말랐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냥 흔한 예쁨이라면 내가 말한 여자는 평생 볼까말까 후광이 비치는 초절정의 아름다움이었는데..세상에 태어나서 본 여자중에 제일 예뻤는데 무슨 소리야?!!
난 하얀 여자가 좋아.
이렇게나 외모의 아름다움이란 기준은 각자 다르다. (그깟 하얀 피부가 뭐라고;;;저거 바보 아냐;)
그리고 일주일 후, 아바나로 돌아가는 터미널에서 아디다스 광고를 찍고 있는 그 아름다운 여신님을 재회했다. 물론 그녀는 나를 모른다. 의식하지도 않는다. 스포티한 평상복도 끝내주게 이뻤다. 다신 볼 수 없을 여신님께 혼자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즐거움을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쿠바가 미남미녀의 나라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그녀는 쿠바인일리는 없지만..) 그 이후 특별히 누군가에게 외모로 현혹당한 일은 없다. 그 일은 매우 강렬했으며 내 시각을 한층 넓어졌다. 어쩌면 백신을 맞은 걸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 아름다움이 아니면 난 더 이상 현혹당할 일이 없어랄까.. 아... 이런 기분이라면 연예인을 좋아할 수도 있겠구나.. 이해도 갔다. 그럼에도 본능과 반대로 욕망을 자제하며 사회적으로 마땅히 지켜야할 선을 넘어가지 않은 내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아름다움엔 혹할 수 있고 그건 죄가 아니다. 그러나 역시 아름다움을 제 1순위의 가치판단 기준이 되게 내버려두고 싶진 않다. (절대 미인이 아니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살면서 만났던 가장 잘생긴 남신과 가장 예뻤던 여신 이야기, 언젠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숲에서 솔직히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네. 저는 현혹당했습니다. 분명
P.S. 구글을 검색해봤는데 그 남자나 그 여자와 비슷한 이미지의 사람은 찾을 수가 없네요. 제 머리속에 지워지지 않을 전설로 남겨두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