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평 남짓의 작은 원룸 안에 이질적인 28인치 캐리어 가방은 민트색이다. 제주도, 일본, 괌을 세 번쯤 다녀오며 여기저기 스크래치와 얼룩의 상처가 남았다. 방 한구석 벽면에 세워져 있는 겨울 옷이 가득찬 캐리어가 너무 익숙해서 곧 잘 잊게된다. 가끔 우리 집에 처음 놀러 오는 사람이 '어? 캐리어네요. 와 진짜 크네요!'라는 감탄을 쏟아낼 때 캐리어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이토록 괴물 같은 크기의 캐리어를 산 건 약 3년 전이다. 원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여행 가방이 하나 필요했다. 작은 캐리어도 없는 주제에 휴대성도 떨어지는 28인치를 고민 없이 샀다. 부모님 집 빈방에 멀쩡히 놓여있는 침대도 들여놓지 않았다. 가구도 인테리어도 관심 없었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니깐
정신이 피폐해져 6개월을 방안에만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는 아무 조건 없이 그 방에서 날 살게 해줬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모든 게 무서웠다. 그냥 거리를 나가고 무언가를 사는 것도 고통이었다. 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이동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사람다운 모든 일상이 고통이었다. 인스턴트 식품과 배달의 민족으로 삶을 영위해나가고 이 모든 걸 잊기 위해 강렬하고 흡입력 강한 영상들만 봤다. (이때 왕좌의 게임을 정주행했다) 신기하게도 6개월쯤 어둠 속에서 지나니 저절로 힘이 났다. 다시 살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고 막연한 공포감은 걷혀갔다. 나는 명료해졌다. 그리고 스페인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어에 크게 감각이 없다. 그러나 해야 했다. 스페인어를 배워서 중남미에 취직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무작정 떠날 수는 없었다. 돈도 없고 두려움도 조금 생겼다. 염치없게도 다시 부모님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난 그때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극도로 꺼렸다. 부모님에게 내 일을 상의드린 적 없었고 모든 건 스스로 결정하고 통보해버렸다. 폐를 끼치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도움을 구하는 법에 대해 배웠고 그것은 부끄러운 것도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마워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도움을 주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다 만나서 내 계획에 대해서 상의하고 조언을 얻었다. 옆에서 나의 어두운 빙하기를 겪었던 이들은 진정 기뻐해 주고 용기를 주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거대한 관문,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간 나는 스페인어를 배워야겠으니 도와달라, 나를 한 번만 더 믿고 금전적 지원을 부탁드린다. 1년 정도 시도해본 후에도 성과가 없으면 뭐든지 하겠다. 그만두고 그냥 돈을 벌겠다고 말씀드렸다.
나와 부모님 사이는 묘하다. 일방적으로 내가 거리를 두고 있다. 부모님은 직업이나 성과 면에서는 단 한 번도 날 의심하거나 나무란 적이 없으셨다. 공부하란 말도 하신 적 없으시고 크게 내가 뭘 원하지도 않기도 했지만 내가 무언가를 요청했을 때 안된다고 하신 적도 없었다. 할 수 있다고 늘 나를 믿어주셨다. 가끔은 혼자서도 알아서도 잘하니깐 이라는 무언의 압박감을 받기도 했지만 배부른 소리다. 이번에도 부모님은 나를 믿어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게 말씀해주셨다. 사실 내가 여행에서 돌아오기 한 달 전쯤 스님을 만나 나의 미래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흔한 일은 아니다. 우리 집은 매번 신년운세를 보러 가거나 점을 자주 보는 가족은 아니다. 엄마는 내 이름과 생년월일 외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내게 강조했다. 스님이 그걸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딸은 해외에 나가서 살 운명이야. 지금 있는 곳이 너무 작고 답답해. 물고기를 어항 속에 가둬두려고 노력할수록 물고기는 너무 고통스럽고 답답하니 그냥 바다로 나가게 풀어줘. 바다에 나가야 해."
그리고 돌아온 내가 외국인과 결혼한다고 했으니 엄마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사형선고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날 울면서 절대 안 된다고 소리 질렀다. 나를 그렇게 타박하신 건 처음이었고 나의 죄책감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집을 나가고 6개월간 집에 돌아오지도 않은 채 연락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스페인어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엄마는 아무래도 네 운명이 말릴 수도 없이 나가 사는 건가 보더라며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하라고 나를 독려해주셨다. 그때는 "엄마 사실 그 스님 내가 매수한 거야."라고 웃으며 농담했지만, 그 이야기는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흔들릴 때마다 나를 지탱해주었다. 나는 할 수 있을 것이고 더 좋은 삶을 살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처럼 해외 취업도 이민도 가능할 거라고.
나는 정신적으로 불안해지기 쉬운 타입이다. 그러나 종교 없이 살았다. 내가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운명이니 사주니 점이니 맹신하게 될 내가 무서워 의식적으로 그러한 예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안정과 자신감을 가져다주는 플라시보(?) 효과는 꽤 좋았다. 그 예언이 내 운명이길 바랐다.
결과적으로는 그 예언 덕분인지 원하는 스페인어 DELEB2에 운 좋게 합격할 수 있었다. 실력도 너무도 부족했다. 그보다 2달 전 앞서 친 B1(좀 더 쉬운 난이도)는 불합격했다. 기대도 안 한 시험에 운 좋게 커트라인으로 합격했다. 아마도 그때 나의 모든 운을 쓴 것 같다.
그러나 아직 3년이 지났지만 당분간 해외에 나가 살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나와 너무 잘 맞는 완벽한 남자친구와 한국에서 일상을 만족하며 보내고 있다. 운명, 팔자란 것은 있다고 쳐도 확정된 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사주나 점을 보러 다니지 않는다. (마치 행복한 직장인은 로또를 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들었던 모두 사주 중에 가장 내가 좋아하는 말은 그 말이다.
'내가 큰 물고기고 큰일을 할 사람이니 작은 곳에서 놓아달라.' 다시 생각해도 멋지다.
여전히 캐리어는 내 방 한구석에 있고 이제 겨울옷을 곧 꺼내고 여름옷으로 채워져 여전히 구석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간편하게 들고 다닐 좀 더 작은 캐리어가 필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