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번 위스키
돼지 불판 볶음밥
그리고 한국
"버번 위스키 한 잔 주세요. 온더락으로."
몇 주 째 준비하던 중요한 미팅이 드디어 끝났다. 팀원들은 오랜만에 맥주라도 마시며 기분 좀 풀자고 했지만 가족 핑계를 대며 빠져나왔다. 이런 날일수록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 혼자 있고 싶은 법이다.
평소에 좋아하던 한국 술집을 이른 시간에 찾았다. 거창하지 않은 동네 술집. 하지만 언제나 삶이 지칠 때 아무 생각 없이 집 같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곳.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위스키를 단숨에 한 모금 들이켰다. 달고 쓰고 뜨거운 액체가 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숨이 막혔지만 역설적으로 살아있다고 느꼈다.
삶. 내가 참 좋아하는 단어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단어는 희망. 희망이 있는 이상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갈만한 사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삶도 사라져 버린다.
한국은 살아갈만한 사회일까? 희망이 있는 곳일까? 근데 왜 한국 사람들은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을수록 "밑"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걸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사람이 자리에 올라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초지일관이 인생관이라던 사람도 있던데 나이를 먹을수록 대단하다고 느낀다.
"밥은 먹었어요?" 매니저 형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형 오랜만이에요. 회사 일이 바빠서 대충 때우고 나왔죠."
"그래도 밥은 든든하게 먹어야지..."
형은 돼지 불판 볶음밥이 맛있다며 식사로 추천했다. 밥도 안 먹고 술부터 마셔대는 내 꼴이 안쓰러웠는지 뿌려 먹으면 맛있다며 모차렐라 치즈까지 서비스로 갖다 줬다.
그놈의 정. 그래도 오랜만에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날 챙겨주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예전에 초코파이를 중국인 친구에게 줬더니 봉지에 왜 한자가 쓰여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이등병의 주머니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설명을 하기엔 너무 복잡해서 그냥 "한국의 정서야"라고 얼버무렸던 기억이 난다.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다. 밥도 같이 먹어야 하고 술도 늘 잔을 함께 부딪혀가며 마셔야 한다. 정은 때로는 불편하다. 그렇지만 따뜻하다. 초코파이 하나로 이 복잡한 감정을 어찌 설명하리.
볶음밥을 잘 비벼 크게 한 숟갈 떠먹었다. 돌판 아래쪽에 밥이 눌어붙어 씹는 맛이 좋았다. 따뜻한 누룽지 위에 올려진 돼지 볶음 한 숟갈. 이게 한국의 정이 아닐까. 앞으로 누군가에게 정을 설명해주려면 이 집을 데려와야겠다.
스피커 사이로 이문세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갑자기 집 생각에 가슴이 아렸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갔던 게 언제더라... 2년이 다 돼 가는 것 같다.
미국에서 일을 하는 것이 참 좋다. 꿈에만 그리던 뉴욕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참 감사하다. 하지만 바쁘게만 움직이는 삶이 오늘과 같이 멈출 때가 가끔 있다. 그럴 때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서 이러는지 허무감이 날 감쌀 때가 있다. 유독 심한 날은 오늘처럼 위스키로 내 감정들을 누르곤 한다.
스티브 잡스는 인생의 점들을 앞을 내다볼 때는 절대로 연결시킬 수 없다고 했다. 현재가 과거가 된 후 우리가 뒤를 돌아볼 때야 비로소 그 점들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떤 점들을 찍어가고 있을까.
순간 몇 년간 보지 못한 친구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목소리만 들었던 가족들의 얼굴도. 마음이 약해질 때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 기억났다. 희망 있는 대한민국 만들기. 과연 무엇이 맞는 걸까. 뉴욕에서의 이 시간들이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는 걸까?
이적이 위로를 해준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맞다. 불변 진리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돌이켜봤을 때 후회되는 인생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나간 일을 걱정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행여나 찍혀가는 점들이 잘못 연결되더라도 후회를 최소화 하는 것일 테다.
뉴욕에서의 이 시간들을 지금은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인 만큼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른손에 들린 유리잔에는 어느새 반쯤 녹은 얼음만 담겨 있었다. 후회 없는 꿈을 꾸러 갈 시간이 또 찾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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