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의 전부같았던 침대를 빠져 나왔다.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너무 누워있어서 그런 것인지, 더 누워있으라는 신호인지 알 수 없다. 어제 미처 먹지 못한 엄마의 죽은 노오랗다. 노오란 파프리카를 갈아 넣었다고 한다. 어젯밤,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귀가 어두운 아빠를 애타게 부르며 믹서기 사용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시는 걸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나서면 엄마에게 잔소리를 하게 될테고, 그러면 아빠는 나를 잡아 먹으려고 하실테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투명인간이 되어 마법의 양탄자같은 침대 위에 누워만 있었다. 늘 그런 식으로 모두가 잠든 시간 편의점에 가 컵라면이나 핫도그같은 것으로 한 끼를 떼우다가 탈이 난 것이다.
월요일부터 아프기 시작했는데 금요일인 어제나 돼서야 병원에 갔다. 3일이면 나을 줄 알았는데... 2년 전에 깨진 어금니가 불편하다고 식사를 하실 때마다 말씀하시면서 치과에는 가지 않으시는 아빠를 닮은 탓인지. ‘도저히 안되겠을 때’ 움직이는 것은 시험공부를 할 때나, 일을 구할 때나, 배가 아플 때나 똑같구나. 스트레스성 위염에 장염이라고 했다. 장염 앞에도 그럴싸한 수식어가 붙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 적을 줄 알았더라면 한번 더 물어볼 걸 그랬지.
집에 돌아오는 길, 죽 전문점 앞을 지났다. 굶든지 죽을 먹으라던데... 내가 죽을 끓이기는 싫었다. 아픈데 내가 먹을 죽까지 끓이려니 처량해서가 아니라 주방에 서는 것이 싫었다. 죽을 끓여줄 사람... 엄마가 어떻게든 끓여주려고 하시겠지만 두팔 걷고 말리고 싶다. 못먹겠다고 거절하는 것도, 억지로 먹는 것도 편안한 일은 아니기에. 죽 전문점에 들어가 1인분을 주문해 거기서 먹었다. 아파트 단지 바로 앞이라선지 홀은 텅 비어있고 가끔씩 포장주문한 것을 가지러 오는 손님뿐이다. 우리집이야말로 여기서 1분 거리인데... 그래도 집에서 먹기는 싫으니까.
집에 와 드디어 약을 먹고 쉬고 있는데, 한바탕 믹서기 대소동을 벌이신 엄마가 죽을 먹으라고 방문을 두드리시는 소리에 놀라서 깼다. 엄마의 목소리가 예전처럼 고왔더라면, 내 심장이 조금은 덜 뛰었을까. 죽 먹고 왔다고, 그건 나중에 먹겠다는 말을 전하며 내가 걱정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다. 몸이 불편한 엄마가 딸을 위해 열심히 죽을 끓였는데 먹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며 나를 괘씸해하고 엄마 대신 상처를 받으실 아빠였다.
어제 미처 먹지 못한 엄마의 죽은 노오랗다. 노오란 파프리카를 갈아 넣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파프리카의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제 쓴 믹서기는 파프리카 찌꺼기를 사방에 묻힌 채 거기 그대로 꽂혀 있었다. 엄마, 이거 어제 쓰신 거 아니예요? 하니 아니라고, 오늘 아침 김밥을 말 때 쓴 거라고... 하신다. 대꾸할 힘도 없어 그냥 설거지통에 넣었다. 나는 왜 아직까지 엄마에게 상식을 요구하는가. 체념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는 내가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노랑 파프리카 죽은 달았다. 생각보다 맛이 있어 잔뜩 겁을 먹었던 것이 미안했지만, 파프리카의 날 것 그대로의 맛이 부쩍 남아 있었다. 과일도 먹지 말라던 의사의 당부가 떠올랐다. 밥은 끓이다 만 것인지, 물을 아주 적게 넣은 것인지 밥알은 살아있는데 겉만 불은 것이 오히려 리조또에 가까운 모양새다. 파프리카 간 것에 밥을 비벼 먹는 기분. 물을 더 넣고 이 죽을 살려볼까 하다가, 물을 넣으면 양이 더 많아진다는 두려움에 관두었다.
어제 식당에서 남겨온 죽이 있는데 엄마 죽을 앞에 두고는 차마 먹을 수 없다. 굶든지 죽을 먹으라고 했으니 오늘은 굶어야지.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저 죽을 먹었다간 더 아플 것 같아요. 아빠가 맛있게 잡수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