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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종로-대학로 한 켠에는 소위 태극기 집회로 요란합니다. 도로 한 켠을 메우고 있는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 그리고 태극기를 볼 때마다 타자는 왜 저들이 성조기라는 아이콘에 저렇게 목을 매는지 궁금해졌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고교 시절 타자의 부족했던 수면 보충에 지대한 공을 세워준 교련 수업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이 큰형님 나라다. 미국 군인들한테 '기브 미 쪼꼬렛' 하면 다 주고 그랬다. 미국 없었으면 우리 다 빨갱이 되서 죽고 없다."며 경상도의 드센 억양으로 침을 튀겨대면서 미국은 착하고 좋은 나라이고, 그 미국에게 감히 한국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은공'을 생각해서 가만히 있어야 하며, 미국에 개기는 북한은 절대 악이라는 늙은 교련 선생의 끝없는 일장연설이 떠올랐던거죠.
그냥 한 때의 수면제로나 썼으면 딱 좋았을 이야기를 왜 머리속 한 구석에 기억해뒀었나 곰곰히 생각해봤더니, 국민의 정부 집권 이후 나라가 망할거라며 미국이 우리나라를 살려줘야 한다고 애절하게 미국을 목놓아 찾던 그 선생의 말이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하게 남아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 성조기, 태극기, 이스라엘기가 공통적으로 보입니다.
이런 미국의 신격화는 크게 세 가지 역사적 배경을 지닙니다. 하나는 원조물자의 지급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자 세력과 달리 개신교를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북에서 토지나 재산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반동분자로 낙인찍히기 딱 좋았고, 실제 1.4 후퇴를 전후하여 많은 수가 북을 떠나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빼앗아간 북한의 대척점으로 미국을 두고 그 미국이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 여긴거죠. 어찌보면 미국이라는 신을 믿고 따르면 복이 온다는 일종의 기복신앙에 가깝습니다.
그 중 전후세대 - 고령층 - 대다수가 기억하는 미국의 이미지는 원조 물자로 인한 빈곤의 해소였습니다. 근본적으로 기아를 해소했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지만 일단 접어두도록 합시다. 그 원조 물자의 집행 과정에 미국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광복 직후의 모습을 본 미군정이나, 한국 전쟁 직후 상황을 둘러본 많은 관계자들이 바라 본 남한 산업은 바로 농업이었습니다. 공업이나 수출은 거의 없었고, 실제 산업 구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농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미국의 초기 원조 물자에서는 거의 산업 관련 물품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사실 그 어떤 나라라도 생판 관계없는 딴 나라에 돈을 퍼주는 것을 기분 좋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미국 역시 그랬습니다. 그렇기에 미국 대외원조의 대부분은 MSA402와 PL480이라 불리는 잉여농산물로 처리됩니다. 원조 자금 중 일정 금액 이상을 반드시 미국 농산물을 매입하게 하여 미국 농민들을 돕는다는 명분을 슬쩍 끼워넣어서 의회를 무마한 것이죠.
1955년부터 원조액 중에서 23%를 잉여농산물 구매에 사용했습니다
1950년대를 대표하는 산업이 소위 3백산업(면직물, 설탕, 밀가루)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가 공업과 뗄레야 뗄 수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1955년~1960년까지「MSA 402조」에 근거한 잉여농산물 도입 내용을 보면 원면이 전체의 44%(1억4천7백만 달러)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인견사 16%, 소맥 14%, 소모사 9%, 대맥 6%의 순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곡보다는 원면을 비롯한 원료 농산물이 다량 도입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초기 3백산업의 면면을 보면 지금도 한가닥 하는 회사의 전신이 다수 보입니다. 제일제당과 금성방직 등 말입니다. 미국을 통해 원면, 원맥, 원당이 공급되면서 이런 산업은 비정상적으로 성장했고, 덕분에 국산 원면은 완전히 몰락해버리게 됩니다. 소맥분을 사용하는 제분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밀 시장이 작살난 것은 이 시점을 전후로 합니다. 향후 우리밀 먹기 운동이 2000년을 전후로 하여 반짝 일어났지만 눈길을 끌진 못했죠.
원조 농산물은 결과적으로 농촌에 타격을 주고 그 이득을 도시와 공업, 유통으로 이전시키게 됩니다. 결과론적으로 봐서 원조가 이득은 맞았습니다. 전 분야 자립경제 시스템 구축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승만의 꿈을 이루기엔 시간도 부족했고 자금도 부족했으며 기술도 부족했으니까요. 미국의 원조가 공업화로 가는 험난한 길을 어느 정도는 완화시켜주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농업에 타격을 주면서 미국 원조 물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3백 산업을 키우겠다라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그때의 잉여농작물이나 국회의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남는 품목을 떠넘긴거죠. 이런 원조 물자와 물자의 흐름을 보면 당시 미국은 무언가 큰 그림을 그렸다기보다, 대충 그때 그때 주먹구구식으로 원조 물자의 종류와 양을 결정했고, 그 프리미엄을 어떻게든 먹으려는 정-재계의 이기심이 만들어 낸 결과가 당시 3백 산업의 발전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자유진영의 '섬'을 지키기 위한 쇼맨십이라 봐도 되겠죠
한국이라는 섬을 어떻게 키워 나갈지에 대한 정책 구상이 부족했던 미국에 이승만은 떼를 쓰며 매달렸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꼭 필요한 나라인데, 어떻게 할 지는 모르겠고, 당장 떼를 쓰니 뭔가 줬다가 내내 이승만에게 휘둘렸던거죠. 많은 당시 미국 지도자들이 이승만을 교활한 사람 정도로 기억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당장 정부 수립 초기에 이승만이 세운 '5개년 물동 계획안'만 보더라도 농업, 광업, 금속, 섬유, 화학산업을 동시에 육성하면서 이를 통해 기계, 제철, 제강, 화학, 조선, 시멘트 산업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당장이라도 런할 것 같은 양반이 떡하니 나타나서는 일본이 가진 것을 지금 당장 내놓으란 소리를 빵빵 지르고 있는 꼴을 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죠. 게다가 이승만은 ECA 자금 원조 규모 역시 3억 5천만 달러를 지르면서 통 크게 달려버립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첫 1년 외엔 무산되긴 했지만요.
미국 입장에선 뭐 이런 날강도같은 생떼쟁이가 다 있나 했을겁니다...
그런데 이런 공업에 대한 육성 뿐만이 아니라 잘 살펴보면 미국과 당시 이승만 정부의 핑퐁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소련, 중국, 북한과 같은 1당 독재 체제 하에서 계획 경제의 공업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농촌을 극도로 쥐어짜면서 소비재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승만은 자본재 70% : 소비재 30%의 원조를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여 소비재 70% : 자본재 30%로 바꾸는 유연한 모습도 보입니다.
이런 자본재의 후순위화는 결국 자체 생산과 수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원조가 끊어지면서 비로소 박정희 정권이 수출이라는 길을 찾아낸 것이죠. 그 이전엔 절대적으로 한국 경제는 이승만이라는 인적 자원을 통한 원조 받아먹기에 의존했다고 봐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원조와 수출이 상충할 때, 항상 이승만 정권은 원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원조는 무언가 절대 선의 개념이나 꽉 짜여진 틀 속에서 움직였다기보다, 이승만의 필요와 징징거림(...)에 의해 지급된 경향이 큽니다. 이승만을 재평가한다면 경제 발전의 기틀이니 국부니 하는 것 보다,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에 어떻게 해서든 원조물자를 끌어와서 밥을 먹게 한 부분에서 그나마 좋은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미국을 찾는 이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복잡한 정세와 이해관계를 다 무시하고 단순히 '쪼꼬레또 기브미'의 기억에만 모든 것을 걸어둔 채 과거의 망령인 박정희 신화를 찾는 이들을 바라보며, 타자는 다시 한번 착잡한 한숨을 내쉽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잘 길들여졌을 뿐인거죠. 스스로 깨우치지 못한 것 역시 잘못이라 할 수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이들을 만든 것은 국민을 이용하고자 했던 위정자들의 사악한 의도에서 출발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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