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인 사람이 자기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할 때.
"내가 페미니스트인건 아니지만-"
저 말 뒤에 페미니즘을 따르는 말이 붙을 때.
어느 주말에 제일 친한 친구 A를 만났다.
A는 공학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한다. 꿈은 초등학생 때부터 한결같이 선생님.
내가 대학에 온 뒤로 부쩍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아져서 이 주제로 A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A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말했다.
"내가 페미니스트인건 아니지만- 블라블라."
'블라블라'에는 여성주의 사고관이 드러났었다. 왠지 맥이 빠졌다.
그리고 그 다음주 주말에 A는 말했다.
"지난 주에 내가 난 중립을 지킨다고 했잖아. 근데- 교육 봉사 같이하는 여대 언니들 말 들어보니까 생각이 바뀌었어. 세상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인걸."
기뻤지만, 여전히 A는 본인과 나를 나누고 있었다. 논페미와 페미로.
친오빠와 페미니즘 주제로 이야기를 자주 한다고 이전에 언급 했었다.
여성주의를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확실히 오빠는 한국의 다른 남성들보다는 인권 감수성이 발달해 있고 맨스플레인도 안하는 편이다. 다만 가끔 소수자 혐오 표현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지적을 해주면 잘 알아 듣고 반성한다. 어쨌든 나는 열심히 오빠를 조신남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오빠도 자신이 페미니스트인 것은 모른다.
"내가 페미니스트인건 아니지만 너를 지지해. 네 말이 다 맞아."
사람들이 자신이 페미니스트인 것을 모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페미니즘을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고 여긴다.
대단한.. 혹은 엄청난 것쯤으로 여긴다.
페미니즘은 그저 성평등주의이며 페미니스트는 성평등주의자일 뿐이다.
혹시나 이퀄리즘을 운운하는 자가 댓글을 단다면 이퀄리즘을 운운하는 자들이 왜 저열한지, 페미니즘이 곧 성평등주의임에 대한 글 링크를 줄 생각은 있다.
- 세간의 눈초리가 두렵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메갈이라고 하는 시대다.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두려워서 선뜻 여성주의에 관심 있다는 말을 꺼낼 수 없다.
요근래 생각해 본건데, 꽤 많은 안티페미들은 페미=메갈 이라며 페미니즘은 해서는 안 될 것이란 분위기를 조성한다. 근데 사실 얘네는 메갈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 알아볼 생각 조차 없다. 얘네 말대로라면 문재인 대통령도, 손석희도, 설현도, 티파니도, 수영도, 아이린도, 방탄소년단의 어떤 멤버도이름 생각 안남, 김혜수도, 다른 수많은 저명인사들도 모두 메갈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곧 대메갈시대가 오겠구나, 생각하고 있다.
걔들 말대로라면 페미=메갈이지않나. ㅎㅎ
페미니스트인 사람이 본인이 페미니스트임을 부정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지만, 그들을 탓할 생각 없다. 그들 잘못이 아니니까.
덧붙여서 나는 그들이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