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보면, 거의 다 짝을 찾는 내용이야. 여성이 어떻게 자기 짝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지. 여성의 짝짓기는 남성의 짝짓기보다 더 복잡해. 진화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더 많은 걸 투자해야해. 이걸 부모투자parental investment라고 해. 즉 여성은 남성보다 후손을 기르는데 더 많은 게 들어가잖아. 더 많이 투자를 하니깐 상대를 선택하는 기준도 더 까다로운 거지.
달리 말하면 암컷은 수컷에 비해 짝짓기 시장에서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암컷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내가 투자한 것에 걸맞는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더 많은 걸 투자해야 합니다. 단지 단백질만 투자하는 그런 거래는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야. 반면 수컷의 입장에서는 많은 투자를 꺼리게 되지. 유전자 입장에서는 갖고 있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적게 투자하는 게 낫거든. 그게 남는 거니깐.
암컷의 투자와 수컷의 투자가 비대칭적으로 발생하는 부분, 그래서 여기서 밀당이 생겨.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짝짓기에서 암컷에 많은 양육자원을 가진 수컷을 선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 인간에게 있어 자녀를 양육하는 건 단순히 물질적인 부나 신체적인 능력만 갖고 되는 건 아니거든. 거기엔 애정이라는 부분이 중요하게 들어가니깐. 그 애정을 자기와 자녀들에게 투자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거지.
그러나 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암컷은 배란은폐를 하듯 자기 감정을 숨기는 전략을 구사하지. 그러면서 많은 수컷들이 자기 앞에서 경쟁하게 하는 거야. 최대한 좋은 특징을 가진 유전자를 얻고 또 좋은 품성을 지닌 남자 수컷이 투자할 수 있도록 말야. 매몰비용을 쌓아서 돌이킬 수 업도록 말야.
그런 걸 생각하면 출산율이 낮아진다는 건, 그만큼 짝짓기에 적합한 남자 수컷들이 없어지는 증거인지도 몰라. 아마도 수컷들이 거새되었기 때문일 거야. 즉 성기를 가지고 있지만 [야생적 사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지나치게 여자와 되어 있는 거지. 왜냐면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운 게 여성의 생존전략이었거든.
즉 남자는 밖으로 일하러 다니며 노동자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집에 들어올 시간이 없어. 그리고 학교에 가서도 여자 선생님들이 가르쳐. 사회에서도 폭력적일 수 있는 남성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남자는 자신의 남성성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여성의 전략을 갖게 되는거야. 지나치게 수다스럽고, 지나치게 공감하는 등. 그러나 내면으로는 억눌려 있는 남성성이 폭력적으로 튀어나오게 되. 이렇게 되는 게 짝짓기 지위경쟁에서 나오는 협오야. 자신이 짝짓기 상대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일반 보복적 혐오.
그러면서 남자는 모험을 떠나는 능력을 상실하지. 모험 속에서 자신의 맘마 자아를 죽이고 괴물에게 잡혀 먹는 그 이니시에이션을 겪지 못하게 되는 거야. 현재의 출산율 저하, 짝짓기가 아닌 폭력적 관계, 가해자-피해자 구도에 대한 지나친 탐닉은, 성 선택의 관점에서 볼 때 좋은 신호는 아닌 거 같아.
수리 불가능한 Y 염색체를 지닌 남자는 남성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