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야기 할 인물은 폭군으로 널리 알려진 연산군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조 : https://steemit.com/kr-history/@eunhaesarang/steemit-62-korean-history
앞부분에 말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빌미로 연산군은 유자광에게 사림파를 제거하도록 시켰습니다.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했는데 사초에 조의제문을 실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처형되었고, 김굉필은 유배를 그리고 학살의 단초가 되었던 김종직은 이미 죽은 관을 꺼내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습니다.
사림파가 훈구파와 외척세력의 음모로 탄압받은 사건을 사화라고 부르는데, 이 사건이 무오사화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총 4번의 사화가 발생하는데 두 번째 사화는 폐비 윤씨 문제가 원인이었습니다.
성종은 한명회의 딸(공혜왕후)을 부인으로 맞았지만 그녀는 자식을 못 낳았고 성종이 20세가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476년 후궁 숙의 윤씨가 왕후로 승진을 하고 같은 해 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그가 연산군입니다.
윤씨는 질투와 시기심이 아주 많았습니다.
성종이 다른 후궁을 총애하자 왕의 얼굴을 할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시어머니인 인수대비도 윤씨를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결국 1479년에 윤씨는 폐위되서 쫓겨나고 3년 뒤인 1482년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윤씨가 폐비되었을 때가 연산군의 나이가 3세였기에 어머니의 일은 훗날 알게 됩니다.
연산군이 왕에 오를 무렵 윤씨의 전말을 듣고 왕후의 지위를 돌려놓으려는 복권을 추진했지만, 신하들은 끝내 반대했습니다.
이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윤씨 폐위에 관여한 성종의 두 후궁을 때려죽이고 그들의 자식들은 귀양을 보낸 뒤 죽여버립니다.
윤씨를 싫어했던 인수대비에게도 횡포를 부려서 결국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또한 폐위에 관여했던 사림파든 훈구파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고 이미 죽은 사람은 관에서 꺼내 부관참시도 서슴지 않고 단행하게 됩니다.
1504년 피바람이 불었고 이 사건이 두 번째인 갑자사화입니다.
연산군은 폭정은 계속되었습니다.
백성의 땅을 빼앗아 사냥터로 만들고, 자신을 비판한 한글 문서들을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이러한 연산군의 폭정에 결국은 1506년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연산군은 쫓겨나게 됩니다.
성종과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사이에 태어난 진성대군이 조선 11대 중종에 오르는데 이 반란을 중종반정이라고 합니다.
이 반란은 대신들이 주도했기에 중종의 권력이 약했습니다.
중종은 자신의 권력을 찾기 위해 개혁가를 모색했고,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를 만나게 됩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성리학에 입각한 도학정치를 실현되기를 바랐습니다.
중종과 함께 조광조의 개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조선 시대의 최고의 폭군이자 독재자 연산군 그리고 무오사화 갑자사화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은 유교 이상사회 실현을 꿈꾸었던 조광조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