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짜를 좋아한다. 할인도 좋아한다. 직장인으로서 첫 연말정산 후 제일 먼저 했던 생각이 '아, 평소에 좀 더 쓸걸'이었다. 결혼전부터 보아왔던, 어린이날 즈음이면 길거리에 내붙기 마련인 무슨 어린이날 큰잔치 따위의 플랜카드를 떠올리며 인터넷으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본다. 대구박물관과 앞산 중턱에 있는 청소년수련원에서 '무료'로 뭔가를 할 수 있다기에 아이를 살살 꼬드긴다.
아래 사진처럼 날이 저물도록 밖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직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은 시간에 청소년수련원을 들렀다. 여러 부스가 있고 저마다 준비는 끝났지만 아직 손님이 오지 않아 한가해 보였다. 안내소에서 스탬프를 받을 수 있는 종이를 받아 일반 코너 6개를 들러 도장을 모으면 특별 코너를 하나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특별코너는 승마, 컵케익 만들기, 헤나, 물총으로 책상의 컵을 쏴서 떨어뜨리기였다. 멀리서 말 대가리 털만 보고도 좋아서 펄쩍펄쩍 망아지보다 더 힘차게 깡총대는 아이를 보며.. 오늘 말 못 타면 집에도 못 갈 것 같다는 부담감이 팍팍 솟아오른다.
심폐소생술은 필수코스다. 여기서 도장을 받지 않으면 특별코너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아이에게 말 한 번 태워주겠다고 심장마비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를 붙잡고 5분동안 설명을 듣고 인형 배꼽을 눌러대는 사람들이 안쓰럽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안쓰러운 행렬에 동참했다.
대학생 동아리에서 나온 듯한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짜 죽은 사람도 살릴기세로 시범을 보인다. 아아아 여보세요, 이거 작년에 민방위가서 해봤는데 그냥 했다치고 넘어가면 안될까요. 빨간차만 보면 삐용삐용이라며 즐거워하겠지만 심장, 심폐, 소생, 30회, 인공호흡, 갈비뼈 등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설명과 상관없이 멀뚱멀뚱 옆사람 엉덩이를 바라보는 저 아이의 맑은 눈빛을 보라.
겨우 도장을 하나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더니 저글링 공연이 한창이다. 공연자와 조수가 많이 닮은 것으로 보아 아들을 데리고 왔나보다. 연출을 가장한 실수들, 물건들을 던지고 돌리는 공연도 좋았지만, 놀기 좋은 휴일에도 아버지를 도와 봉사활동을 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건물 내부에는 마리오, 백설공주, 뽀로로가 쉴새없이 다니며 아이들과 악수하며 사진을 찍는다. 체험코너마다 절반은 코너 자체의 재미를, 절반은 승마나 물총에 대한 기대를 품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OPS코너, 휴대폰 절반크기의 투명 플라스틱 판에 그림을 그려 오븐에 구으면 엄지손톱 두 개 크기의 사각형으로 압축된다. 작아지면서 더 선명해진 플라스틱판을 열쇠고리처럼 쓰면 된다는데 아이는 오직 말에 관심이 있을 뿐. 실컷 만들었더니 필요없단다. 그래 넌 필요없겠지, 너 말 한 번 타려면 도장받는데 필요하단다.
펄러비즈 코너. 내가 아이를 데리고 이런 인내심 수련장 같은 고난도 코스를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도장이 필요했을 뿐. 컬러 프린트 된 종이 도안 위에 투명 플라스틱판을 놓고 거기에 모래알 같은 컬러 플라스틱을 한 알씩 배치하면 완성. 그걸 오븐에 구으면 알갱이끼리 달라붙어서 열쇠고리가 된다고 한다. 내가 빨강색을 하나 놓으면 아이가 까만색을 놓다가 쓰러뜨리고, 내가 다시 세우면 아이가 가까이서 보겠다고 당기다가 쓰러뜨리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죄송하지만 도장만 좀 찍어주시면 안될까요. 이거 완성하려면 72시간쯤 걸릴 것 같은데요.
아빠, 나무블럭 놀이하자. 얘야, 저건 도장을 안 찍어주는 거란다. 도장을 모아야 말을 탈 수 있는데 말부터 타고 시간 남으면 나무블럭할까? 예, 아버지 분부를 따르겠나이다. 내 아이는 이렇게 말을 잘 듣는 순한 어린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요새 말로만 듣던 액체괴물 만들기 코너도 있다. 탱탱볼과 액체괴물 중 하나를 택하여 만들 수 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처럼 보이는 아이가 이 코너를 맡아서 설명을 하고 재료를 나눠주고 있었다. 저 나이에 이런 행사에 진행요원으로 참가하다니. 대견스러운 마음은 1분후에 조금 희석되었다. 참가자들에게 "꼬마야, 이거는 ㅇㅇㅇ라는 가루인데 이게 ㅇㅇㅇ라는 물질과 섞어주고 조금 기다리면 ㅇㅇㅇ가 되는데 절대로 먹으면 안돼"라는 말을 녹음기처럼 반복하는데, 얼핏봐도 먹고싶지 않은걸 자꾸 먹지말라고 하니 오히려 저 가루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먹을 틈도 주지않고 자기 혼자 다 붓고 젓고 완성품만 내어주면서..
부직포를 길게 잘라 꽃 모양으로 묶어 통에 담은 뒤 그 통에 물을 넣으면 가습기 완성이다. 거실에 놓고 가습이 빠를까 곰팡이 피는 게 빠를까 비교하고픈 호기심이 살짝 일어난다. 아이는 가위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삐뚤빼뚤한 부직포 띠를 완성했고 아이 엄마는 그걸 고무줄로 묶어 꽃을 완성했다. 집에서는 잘 떠올리기 힘든 활동인데 덕분에 아이의 소근육이 조금 더 발달하지 않았을까 고마웠다.
바람개비 만들기.
로봇들의 공연. 예전에 대구국립과학관에 가서 본 적이 있다. 그땐 강남스타일이었는데 업데이트가 되었는지 여러 곡에 맞춰 춤을 춘다. 이 앞을 지나다가 뜬금없이 붙잡혀 춤을 따라 추고선 선물을 얻었다. 나와 달리 아무데서나 춤추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이가 신기하다. 선물을 받고는 신나서 뛰어다니는 걸 물끄러미 바라본다.
엄마 손에는 2천원짜리 짜장밥, 아이 손에는 1천원짜리 순대, 내 손에는 덜 마른 탱탱볼 한 개. 떡볶이는 영 맛이 없었다. 특유의 냄새 때문에 사람들이 상시 몰려들어 채 익기도 전에 사 가는 탓에 나 역시 물맛나는 떡볶이를 사야했다.
아이는 비눗방울 놀이를 가장 재미있어 했다. 승마코너에서 아이에게 손짓하더니 말에게 당근을 먹이게 했다. 2주가 지난 지금에도 수시로 말 먹이주러 가자는 말을 한다.
대망의 특별코너 시간. 막상 가니 말이 쉬는 시간이라고 한 시간을 기다리라고 했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서 스탬프 용지를 두 장 더 받아 다시 코너를 돌며 도장을 더 받아서 컵케익, 물총쏘기를 먼저 끝냈다. 아이는 내가 유치원 때 했던 경험을 벌써 맛보았다. "얘는 승마헬멧 스몰사이즈 하면 될 것 같네요. 어, 이게 왜 안들어가지? 미들사이즈 가져오세요. 엥, 좀 뻑뻑한데 얘는 라지사이즈 할게요." 머리 큰 아이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
다음 날은 비가 왔는데 박물관으로 향했다. 수시로 비가 왔고, 박물관 내부는 더웠고 밖은 추웠다. 공연은 재미있었는데 아이는 아직 개그코드를 이해할 나이가 아니다. 계속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청소년수련원처럼 무료체험코너가 몇 구네 있었고 어린이 전용 도서실도 있었다. 지난 추석에도 도서실과 무료 체험 몇가지 때문에 들렀는데 체험내용은 추석 때 했던 게 어린 아이에게 좀 더 맞는듯하다.
비가 온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무료체험 활동을 쉽게 할 수 있었다. 페이스페인팅을 하면서, 파랑새를 고른 아이는 그날 밤 세수를 하며 그림이 지워지는 걸 아쉬워했다.
컬러드로잉, 사진을 찍어 해당 코너의 담당자에게 문자로 보내면 그림을 그려주는 방식이다. 아이가 우산을 들고 재미있는 자세를 취해주어 그림도 재미있게 나왔다.
드림캐쳐와 나비문양 팔찌 만들기. 드림캐쳐는 재료를 집에 그대로 들고와서 만들어 거실 천장에 붙여놓았고 아이가 지금도 매일 일어나면 드림캐쳐가 잘 붙어있는지부터 확인한다. 팔찌는 결국 실패했다. 나이론 줄에 구슬을 꿰어넣고 매듭을 짓는건데 길이 조절에 실패했다. 길이를 조절하려다 줄이 터졌고 구슬은 사방팔방 흩어졌다.
개그와 서커스를 섞어놓은 공연. 관객을 끌고 나와 무언가를 시키기도 하고 무언극으로 제법 웃긴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랜만에 자연스러운 코메디를 보는 것 같아 참 좋았는데 아이가 덥다고 하여 결국 마무리를 보지 못하고 나가야했다. 이어서 마술공연, 비눗방울 공연도 있었는데 아이가 좀 더 커서 와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집에와서, 아이는 청소년수련원에서 마음껏 갖고 놀지 못한 비눗방울이 못내 아쉬웠는지 한 밤중에 내 손을 이끌고 나가서 실컷 불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어린이날 연휴가 끝날 무렵의 내 모습이 여기 뽀로로와 흡사했던 것 같다. 뽀로로 너 이놈,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