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늘 그랬다.
거절이 확실한 무심한 배려가
자꾸만 그에 대한 마음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다.
설사 그 답이 아니라고 한들
최근 결단이 있었고 나는 불안하지만 가능성을 선택했고
나는 자유로워진만큼 위태했다.
예전부터 그에게 사실을 말하고 홀가분해지고 싶었고
갑자기 걸려온 그의 전화는 때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한 번의 불발 속에
결국 또 먼저 다가간 건 나였다.
억울했다.
보고 싶었다.
그냥 억울해지고 보고싶었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답지 않은 거짓말(진실을 말하지 않음.)을 하면서도 나는 괜찮았다.
달이 밝은 골목길 전화를 했고, 그는 받지 않았다.
끊으려는 순간 그가 받았다.
혹시..혹시 괜찮으면 내일 볼래?
왠지 내가 가면 네가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가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시덥잖은 말투였으면 실망했을텐데
그럼 나야 고맙지, 미안해서 어쩌지
진심어린 대답이 바로나오니 내가 널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겠어.
기쁘고 설렜다 다시...
아침에 다시 건 전화에 자다 깬 목소리에 너는 불친절했다.
나는 다시 소심해졌다.
1시간 가량의 버스 안에서 이어폰 속 소리는 그저 스쳐지나갔고
나는 의외로 덤덤했다. '그래 떨지마 굳이 떨 필요는 없잖아.'
오버할 필요도 없고 나는 그냥 나고 의식하지 말라고
다만 머릿 속에 말을 할까 말까란 생각이 잊을만하면 떠올랐고
사실 난 이미 말하기로 결정했다.
실로 오랜만에 밥을 먹고
너와 먹는 밥은 별로 맛있지가 않다.
난 산이의 밥한끼먹자 노래에 꽂혀서 꼭 맛있는거 사주려고 했건만
그냥 있는대로 대충 먹었고, 식당은 전세 낸 듯 조용했고
덕분에 꽤 진지한 얘기도 했다.
너는 너의 얘기를 했다.
너의 힘든 얘기, 죄책감, 자괴감 두려움
그리고 미래
알고 있다. 그 곳에 연애나 사랑, 이성같은거 따위 끼어들 틈이 없다.
그건 너무 벅차고 그건 네게 너무나 사치스러운 얘기다.
너의 얼굴을 본다.
넌 네 짧은 머리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런건 내게 상관없다.
그냥 넌 너다. 네 첫인상이 무서웠는데 지금은 무섭진 않다.
다만 어둡고 약간 우울해보인다. 웃는게 아무리 이뻐도
넌 계속 너의 얘기를 했다.
네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이겨내려고 노력하는지, 얼마나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큰지
예전과 얼마나 변했는지, 소소한 기쁨을 느끼고 싶은지
얼마나 돌아가기가 싫은지... 복귀날은 그래 내가 회사가기 싫은 날보다 더하겠지
난 그냥 웃었다.
적당한 때라고 생각했을 때 물었다.
-나 이상한거 물어봐도 돼? 진짜 이상한거..
-그래 물어봐
-너한테 나 꽤 의미가 있는 친구지?
-그럼 내가 왜 널 만나는데
-그래? 그럼 하고싶은 말 있었는데 하면 안되겠다.
-왜 뭔데 그래?
-나 네가 힘든 것도 알고, 네 생활만으로도 너무 벅찬거 아는데.. 너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나도 너한테 좋은 친구 해주고 싶은데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깐
그냥 네가 계속 모르면 내 마음이 억울할 것 같아.
으음.. 넌 그냥 민망한듯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내 생일 때 한번 펑펑 운적 있다고
부모님이 와서 생일 축하해주는데 나같은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떨어졌던 자존감이 위축되었던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기분
지금 그런 기분이야. 정말 고마워.
-내가 널 왜 좋아하는지 생각해봤는데 뭔가 조건같은거 때문에 좋아하는 건 아닌것 같아. 나도 내가 널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어쨋든 뭘 바라고 말한 건 아니야... 그리고 네가 나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
-그래.. 지금 난 0점도 아니고 마이너스인데
-미련인지도 모르겠어. 후회 아닌 후회가 있다면 그 때 너와 만날 때 (나도 좋다고 할 걸..) 더 잘해줄걸.나도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고, 너도 너무 어렸고
-뭘 어떻게 더 잘해줘.
그게 다 였어.
고맙다는 말...이런 날 좋아해줘서 고맙다는 말
그리고 마치 요즘 잘지내니 그냥 그렇지같은 일상적인 대화를 한 마냥 다음대화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고 말하는 순간에 떨렸지만
말하고 나니 별 거 아니었다.
뭐 이런걸로 고민했지 싶었다.
마치 그냥 나의 잘못을 덤덤히 고백했고 너는 그것을 고민한 내가 미련스러울만큼 관대하게 사하여 주다.
돌아오는 길
어색하게 시간이 흐르는데 기다리는 버스가 안 온다.
난 먼저 가서 어머니 얼굴이나 보라고 했고
버스를 탔는데 음악이 듣고 싶었다.
스탠딩에그의 고백... 노래가 좋다.
거기선 손도 스치고 내 어깨에도 기대고 다른 사람 만나지만
넌 절대 손 한번 스친적 없고, 어깨를 친적도 없고 게다가 다른 사람 만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너의 연애 상대는 못된다.
넌 훨씬 좋은 여자, 너와 비슷한 여자 만날 자격이 되니
뭐 기다리는 것도 이상하다. 기다릴 것도 아니다.
근데 그냥 마음이 울적했다. 뭔가 좀 더 뭐라도 말해주길 바랬다.
차라리 부담스러워 해줬으면 불편해지면 좋겠는데
넌 전혀 아닌 듯 고마워만 했다.
마치 굿닥터의 문채원이 주원에게 고맙다고 말하듯이
그래도 사춘기 소녀는 아니라 눈물같은 게 나오진 않는다.
억울하지도 밉지도 않았다.
그냥 멍하다 배고프면 밥먹는다.
괜찮았다.
도착해서 공부를 했다. 열심히 한다.
네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잘 모른다.
'나 좋아해? 그래?... 근데 그게 뭐 어때서?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어...'
가 네 마음이 아닐까 싶다.
근데 그거 알아? 난 마음 정리하려고 말한건데..
그렇다고 그냥 유치하게
[ 이젠 만나지 말자.
널 만나면 감정이 풍부해져.. 감정의 촉진제 같은 역할을 한단 말이야.]
라는 말 따위 할 수 없어서 그냥 담담히 말하고 모른척 했다.
그래 그래도 네가 괜찮으면....
아니 그래도 내가 안 괜찮다.
공부나 하자.
나 역시 내 인생이 벅차다.
이렇게 다짐한 순간
정말 상상도 못한 순간 전화가 온다.
낯익지 않은 화면에 네 이름..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는다.
-도착했어?
-응 잘했지 너 가자마자 바로 버스 왔어.
-그래? 가는거 봤어.
-어머니는 잘 보고 갔어?
-응.
-이제 들어가는 거야?
-응 옷입고 가야지
-너 한달 후에는 있을거지?
-글쎄...
-어디 갈거면 말하고는 가야돼.
-응..문자는 된다 그랬지? 문자는 남기고 갈게
-오래 꺼놓으면 문자 오래된 건 안오던데...
-그래? 어쩌지? 편지라도 써야되나?ㅋㅋㅋㅋ설마 한달 후엔 있겠지
-잘들어가.
아무 뜻 없는 너의 호의가
여전히 No라는 대답은 알지만
자꾸만 이 감정을 이어가게 만든다.
넌 왜 그런 질문을 내게 할까?
계속 거기서 살거지? 한달 후에도 거기 있을거지 같은 아무 쓰잘떼기 없는 질문들....
절대 내가 좋아서 하는 건 아닌 질문들
그럼에도 난 너의 그런 무심한 친절이 좋다.
그래서 자꾸 곱씹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천천히 이 마음 잊어가겠지..
네가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나도... 다른 생을 살아가면
너와의 미래를 꿈꾸지 않아도
네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도
네가 부담스럽거나 외면해도
나는 아직은 네가 좋다.
아직은.. 말야 오늘까지는..
네가 좋다.
자괴감을 잔뜩 느끼고 부정적인 말만 하다가
빛나는 미래에 반짝이는 눈을 가진
우울한 표정의 네가 좋다.
날 안좋아하는 네가 좋다.
(feat 5년전 나의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