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조금 특이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써니 같은 영화처럼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동창회는 한 번 가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학교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고 나의 가장 좋았던 호시절도 아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내가 가장 긴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고등학교 때 만났다. (물론 늘 그들과 1:1로 만난다) 확실히 그 고등학교에는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꽤 많았다.
21살쯤 친구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대학에 와서 평범한 줄 알았던 고등학교 시절이 사실은 조금 남달랐다는 고백이다.
내가 고등학교 이야기를 하면 다들 믿지 않아 세상에 그런 학교가 어딨냐고 하더라고.
그 학교에 확실히 어딘가 설명하긴 쉽지 않은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늘 그 분위기에 휩싸여서 느끼지 못했을 뿐.
그 학교는 세상과 유리된 작은 사회였다. 그 당시 비평준화 지역인 그곳은 원서를 지원하면 성적에 맞춰 학생을 가르곤 했다. 그 학교는 힘이 하나도 없는 자유방임형 가톨릭 재단의 소유였다. 재단 이사장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다. 그 학교는 재미없는 범생이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시대에 통용되지 못할 유물 같은 교칙이 있는 이상한 학교였다.
운동화도 신을 수 없었고 장식품이 박힌 예쁜 구두도 금지다. 머리는 귀 밑 7cm, 남녀가 사귀는 건 원칙적으로 금지, 잘못 걸리면 전학을 가야 했다. 그런 이상한 교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애초에 공부를 열심히 하던 아이들만 선발되서일까? 그 학교엔 크게 반항을 한다거나 사고를 치거나 일탈을 저지르는 소위 날라리, 불량 학생이랄 게 없었다. 왕따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선생님이 학생을 다루기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학교 학생들은 까탈스러웠다. 잘못 훈계했다가는 선생님 또한 그 사회에서 찍혀버리는 거다. 그 학교는 확실히 바깥세상 분포보다도 더 감성적이고 예민한 학생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언뜻 보면 어른스러웠고 차분했고 성숙했지만,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를 만큼 순수하고 맑았다. 현실적이지 못한 생각이 은연중에 공유되곤 했다. 그곳에서 세속적인 가치는 인정되지 않았다.
각자 비밀이 많았고 전체적으로 평화로웠지만 서로의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교양 없는 사람은 배척되곤 했으며(그게 왕따가 없던 이유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도 그 점을 들키지 말아야 했다. 생각은 많았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마음속 의문운 묻고 질문하지 않지만 늘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뭐랄까 호르몬이 왕성한 10대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특유의 발랄함이나 에너지 같은 게 전혀 없었다.
우리는 비난하지 않았지만 실망했다. 한 번 실망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러한 암묵적인 룰이 존재했다. 무언가 깨질 것처럼 불안했지만 평온했고 은유로 가득 찬 알 수 없는 특유의 아우라가 있는 이상한 나라.
나는 문과반이었다. 원칙적으로 남녀는 분리되어야 했지만 문과를 택한 남자가 부족한 관계로 우리 반만 예외적으로 합반이 되었다. 뭐, 당시 이성에게 관심도 없고 불편하단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곧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서로 다른 성별이란 사실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성적에 의해 반이 나뉘는 비인간적인 학교였는데 덕분에 2학년과 3학년 같은 반이었고 반 아이들도 거의 동일했다.
우리 반은 어쩌다 보니 늘 제비뽑기로 자리를 정했다. 자연스럽게 짝도 정해졌다. 가끔씩 몰래 쪽지를 바꿔 원하는 짝을 얻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운명에 순응했다. 물론,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자리가 나와도 별 말없이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2년간 그 제비뽑기를 하면서 이상할 정도로 유독 한 남자아이와 짝이 자주 되곤 했다. (그를 J라고 하겠다) 세보진 않았지만 10번은 가뿐히 넘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전혀 친하지도 비슷한 부류도 아니라서 주변에서도 놀라곤 했다. '너네 또 짝이야? 거짓말' 그럼에도 특별히 짝이 되는 것에 불편함은 없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 우리는 꽤 괜찮은 짝이었다. 둘 다 남 이야기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 아이는 남자아이들의 우상이었다. 그는 피부가 정말 하얘서 별명이 미군이었다. 운동을 엄청나게 잘했는데 시합날 늦잠 자기 일수라서 안 나올 때도 있었다. 체육대회가 열리면 몇몇 아이가 아침에 그를 깨우러 가기도 했다. 그러면 상대편은 어떻게든 그 아이 없이 시합을 먼저 치르려고 했다. (덕분에 우리 반 남자아이들이 고작 11명뿐이었는데 체육대회에서 2등을 하기도 했다. 다른 반은 35명쯤 되었다) 물론 그 아이가 체육을 잘했기 때문에 우상이 되었던 건 전혀 아니다.
아무리 이성교제를 막아봐야 할 사람은 다 한다. 그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이성교제에 관심 있는 사람 중 그 아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교과서로 불리며 때론 신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야말로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 그는 적당한 키에 적당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그다지 잘생기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번 찍으면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무슨 비법을 가졌는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반드시 그 여자도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유롭게 연애하다 미련 없이 헤어지곤 했다.
게다가 그를 욕하던 여자가 그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있어도 그와 헤어진 여자 중 그를 욕하는 사람 또한 없는 것이 미스터리였다. 그 나이에 연애는커녕 여자 사람과의 관계에도 서툴던 어리숙한 바보들만 가득했던 그 학교에 단연 독보적이고 이질적인 전설과 같은 '선수'였다.
내가 그와 처음 짝이 되었을 때 그의 평판은 바닥을 달리고 있었다. 우리 반 최고의 인기녀와 사귄 지 막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인데, 그 스캔들은 널리 퍼져 나 같은 사람의 귀까지 흘러들었다. 분명 이상형과 취향이 전부 다른 남자 5명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결국 그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같았다. 그중 한 명이 그 인기녀와 사귀게 되었고 얼마 안가 차였다는 슬프고 흔한 이야기. 그런데 헤어진 지 이틀 만에 J가 그 마성의 인기녀를 사귀게 되었다. 문제는 친구가 많지도 않은 J의 유일한 절친이 바로 그녀가 사귀던 전 남자 친구라는 사실이다. 세간에선 그 사건을 '흔들린 우정'이라고 불렀다. 그건 명백한 규칙 위반이었다. 그 학교에서 있을 수 없는 전혀 고상하지도 교양 넘치지도 못한 배신 행위라고나 할까나.
가끔씩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내가 J를 좋아하게 될지 아닐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J에 옆에 있는 여자치고 결국 J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여자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좀 궁금하긴 했다. J의 매력이 뭐길래 여자들이 좋아하는 걸까. 그러나 그렇다고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내가 관심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 모든 관계가 낭비라고 생각하는 세상 시니컬하고 부정적인 여자아이였다. 별 뜻 없는 일촌신청도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해 거절해버리는 사회성을 지니고 있었다.
J와 처음 말을 하게 된 건 MP3 때문이었다. J는 당시 최신 목걸이형 아이리버 MP3를 늘 목에 걸고 다니며 음악을 들었다. J는 내게 '너 KCM 신곡 들어봤어?'라고 물었고 내가 아니라고 하자 MP3를 내게 빌려줬다. MP3를 듣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몇 개 발견하게 되고 웃기게도 그와 음악 취향을 조금은 공유하게 되었다. 그 후로 쉬는 시간이 되면 J는 '들을래?'하고 친하지도 않은 내게 mp3를 빌려주곤 했다.
지내면서 확실히 J가 다른 남자와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 J는 남의 일에 관심도 없고 철저한 개인주의자인데 의외로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J는 예의 바른 신사였다. 분명 내게 건질 게 하나도 없음에도 그는 날 똑같은 평범한 여자애로 대했다. 다른 남자 같았으면 외모나 성격에 따라 그 여자를 대하는 방식이나 말투가 달라지곤 했을 텐데.(예를 들면 우리 친오빠랄까). J는 예쁜 애나 덜 예쁜 애나 똑같이 대했다. 상대방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는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억지로 어색하게 주제를 찾거나 귀찮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적당히 대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지루한 자율학습 중 내가 J에게 물었다.
-너는 다른 사람 말이 신경 쓰이질 않아? 괜찮아?
-그거 신경 써서 뭐해? 어차피 내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할 그럴 얘기.. 나는 그냥 무시해.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좋아하면 그냥 만나. 그게 더 좋지 않나? 간단해.
나는 속으로 그건 이 학교에서 그렇게 간단한 투쟁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확실히 그 마성의 인기녀가 J를 좋아하는 이유만큼은 알겠다. J는 우유부단함이 없는 남자였고 늘 자신감에 넘쳤다. 그땐 자존감이란 단어를 몰랐지만 J는 분명 자존감이 엄청 높은 사람일 거다.
그의 자유도가 부러웠다. 우리 둘 다 남 이야기에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썼지만 확실히 나와 J는 양극단에 가까웠다. 나는 남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반강제적으로 혼자임을 택했다면 J는 제 발로 여유롭게 고독함을 택했다. 내가 너무 무거운 반면 그는 참 한 없이 가벼웠다. 그의 생활을 보고 있자면 그건 하나의 거대한 농담과도 같았다. 사람이 저렇게 가벼워도 될까란 의문이 들다가도 이내 어차피 내 일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버리곤 했지만. 어쨌든 그는 유일하게 그 묘한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은 채 자기만의 색깔을 잃지 않고 고등학교 생활을 만들어 나갔다.
그 후로도 몇 번 J의 여자 친구는 바뀌었고 우리는 몇 번 더 짝이 되었다. 그와 적당히 잘 지냈고 더 친해지는 법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우리 사이에 대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내가 J를 좋아하는 일도 없었다.
20살이 지나고 몇 번의 연애를 하고 수많은 연애를 보면서 가끔씩 J를 떠올린다. 우리 중 유일하게 혼자 '어른'의 연애를 했던 J. J는 그 기묘한 고등학교를 지나 평범한 사회에 나와서도 여전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을까? 아니면 그의 마법은 기묘한 곳을 떠나 사라졌을까? 연애는 모르겠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것 같다. 어디서도 주눅 들지 않고 그 답게.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여전히 여자들에게 사랑받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