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를 들어가며]는 뉴욕의 투자은행에 취직하기까지의 제 이야기를 각색한 연재 수필입니다. 지난 편은 본문 밑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톨 사이즈로요."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회색빛 창 밖을 바라봤다. 검은 빌딩들 아래 코트를 동여맨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A 은행의 로비가 보였다. 믿기 어려웠지만 나는 꿈에만 그리던 뉴욕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생에 최악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미국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 수요일이 되었지만 몸은 아직도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A 은행이 보낸 합격 이메일에는 MD (Managing Director, 전무급) 한 분이 출장 때문에 목요일에 우리 학교를 방문할 일이 있는데 격려 차원에서 최종면접에 합격한 7명의 학생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죽이 아닌 다른 음식을 먹으면 곧바로 토를 했기에 참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말이 '격려'지 사실상 또 다른 인터뷰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일단 무조건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저 목요일까지 컨디션이 나아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목요일 점심이 될 때까지도 상태가 전혀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무거운 마음으로 인사과에 이메일을 보냈다.
"어제 뭘 잘못 먹었는지 식중독에 걸린 것 같습니다. 몸 상태 때문에 안타깝게도 저녁 식사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인사과로부터 괜찮으니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고 답장을 받았지만 저녁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로 벌써 감점을 받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게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아 옷장에서 양복을 꺼내 정리했고, 쉬면서 마지막으로 인터뷰 준비를 했다.
다음 날 은행에서 잡아준 비행기를 타려면 일찍 일어나 공항으로 가야 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잘 자야 한다는 생각에 약국에서 수면제가 포함된 감기약을 샀다. 하지만 처음 보는 약을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약 덕분에 열은 떨어졌지만 정신이 너무 몽롱해져 잠에 들 수가 없었고, 밤새도록 침대에서 뒤척였다. 어둠 속에서 천장을 보며 양을 세어보기도 했지만 답답한 마음이 들수록 잠은 더 먼 곳으로 달아났다. 결국 동이 트며 핸드폰 알람이 울리고 말았다.
알람을 끄고 뻣뻣하게 굳어있는 몸을 침대에서 일으켜 샤워기 아래로 향했다. 뜨거운 물이 머리로 쏟아졌지만 약 기운 때문인지 감각이 무뎠다. 마치 남의 몸을 내가 조정하는 것 같았다. 내 생에 가장 중요한 하루는 그렇게 불길하게 시작됐다.
"주문하신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 나왔습니다."
손에 쥔 커피잔은 뜨거웠지만 머리 속은 여전히 솜이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를 입으로 불어가며 조금씩 마셨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니 비행기에서 준 비스킷 외에는 어제저녁부터 먹은 것이 없었다. 빈 속에 커피가 들어가자 카페인이 곧바로 핏줄로 흡수됐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인터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물만 한잔 마시고 카페를 나와 길을 건넜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었다면.
은행 로비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인터뷰를 보러 왔다고 얘기를 하자 38층으로 올라가라고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는 신속하게 빌딩의 정상으로 향했고 문이 열리자 유리로 된 회의실이 여럿 보였다. 면접장으로 향하는 길의 바닥에는 고급 카펫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비싸 보이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홀의 끝에는 30명은 족히 들어갈 것 같은 대 회의실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최종면접에 합격한 6명의 다른 친구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들 전날 밤에 있었던 MD와의 저녁식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아... 나만 참석하지 못했구나.'
보통 최종면접에서 오퍼를 받을 확률이 50% 정도 된다고 한다. 7명이 올라왔으니 오늘도 3-4명 정도는 탈락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나는 이미 그 그룹에 포함이 되어있는 것만 같아 더 위축됐다.
1시가 되자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은행에서 일을 하는 뱅커들 몇 명이 인사과 담당자와 함께 들어왔다.
"아침부터 먼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어요. 뉴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인사과 담당자가 미소와 함께 우리를 반겼다.
"오늘 여러분들이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면접에 임할 수 있도록 이 회의실을 준비했어요. 간단한 다과와 음료, 그리고 샌드위치가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 편하게 자리에 가져가서 드시면 됩니다.
오늘 초청되신 7분은 각각 3명의 면접관과 인터뷰를 보게 될 것입니다. 면접관들의 숫자가 더 적기 때문에 조별로 나눠서 움직일 계획인데 본인의 인터뷰가 끝나면 이 회의실로 돌아와 다음 인터뷰까지 대기를 하시면 됩니다. 인터뷰 스케줄은 나눠드릴 이 종이에 적혀 있어요."
글로벌 투자 은행답게 면접도 빈틈없이 준비해 놓았다. 종이를 보니 내 이름은 두 번째 조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각 인터뷰는 30분씩 잡혀 있었고 첫 번째 조의 면접은 30분 뒤, 그리고 두 번째 조의 면접은 1시간 뒤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여러분이 회의실에서 대기를 하는 동안 질의응답을 해주실 뱅커 몇 분께서 저와 함께 오셨어요. 아마 중간에 일 때문에 빠지셔야 할 분도 있고 또 나중에 오실 분들도 있지만 최소한 3-4분 정도는 이 회의실에 계실 예정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한 분씩 소개가 가능할까요?"
인사과 직원의 부탁에 따라 방에 있는 4명의 돌아가면서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2명의 애널리스트와 1명의 어쏘시어트, 그리고 1명의 VP (Vice President, 이사급) 뱅커들이었다.
"면접을 앞두고 아마 많이 떨릴 거예요. 하지만 전혀 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에 오기까지 많은 경쟁자들을 제치신 분들이니 준비는 충분히 됐으리라 생각됩니다.
저희의 역할은 오늘 여러분이 긴장을 하지 않고 마음 편히 인터뷰에 임할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인터뷰 전까지 쉬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편안하게 물어보시면 돼요."
VP가 우리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대와 배우들만 바뀌었을 뿐 또 다른 비공식 면접임을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방 안에서 하는 모든 언행이 관찰되고 기록되고 있을게 뻔했다. 하지만 그것이 A 은행이 정해놓은 게임의 법칙이었기에 우리는 미소를 머금고 참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능숙히 "네트워킹" 모드로 전환해 각자의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네트워킹을 할 상태가 아니었지만 혼자 앉아 있기도 뭐해 음식이 올려져 있는 테이블 앞을 서성였다. 샌드위치는 도저히 먹을 여건이 되지 않아 스파클링 워터를 한 병 집어 자리로 돌아와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곧 30분이 지나 선발대에 속한 세명이 면접을 보러 대 회의실을 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뱅커 한 명이 회의실로 들어와 앉아있는 우리들과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내 이름을 대며 악수를 했다.
"아! 네가 한국에서 전화 면접을 본 친구구나! Tiffany 한테 얘기 들었어. 1차 인터뷰 완전 잘 봤다며?"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자 Scarlet은 반갑다며 얘기를 꺼냈다. 알고 보니 Tiffany와 같은 팀에서 일을 하고 있고 둘이 친한 모양이었다. 격려 차원에서 던진 말이었을 테지만 1차 인터뷰를 잘 봤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정말 말 한마디에 살고 말 한마디에 죽는 하루였다.
"오늘 면접은 1차 면접보다 쉬울 거야.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내가 많이 긴장을 해 보였는지 Scarlet이 기운을 내라고 한 마디 해줬다. 같은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음에도 굳이 자기 시간을 내서 우리를 격려해주는 그녀가 참 고마웠다. 면접에 관한 얘기를 계속하면 우리에게 부담이 될까 봐 대화의 주제도 다른 토픽으로 돌려줬다. 요즘 학교에서 가장 핫한 게 무엇인지 물어봤고 자기도 졸업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학교가 그립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 보니 30분은 금방 흘러갔다.
"자, 그럼 시간이 거의 됐으니 다음 조 사람들은 일어나서 인터뷰 장소로 이동할까요? Jina 씨는 왼쪽 방, Stephen 씨는 가운데 방, 그리고 미네르바 씨는 오른쪽 방으로 가시면 되겠습니다."
인사과 직원의 지시대로 회의실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니 제 1 면접장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있는 방이 보였다. 아직 이전 인터뷰가 끝나지 않았는지 방문이 닫혀 있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아까 마신 커피 때문인지 심방 박동이 아직도 빠르게 느껴졌다. 드디어 결전이 시작되는구나. 긴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윽고 방문이 열렸고 먼저 면접을 봤던 친구가 나오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행운을 빈다 친구!"
방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 두 개가 책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한쪽 의자에는 하얀 백발과 파란 눈을 가진 신사가 앉아있었다.
"앞자리에 앉으세요."
매처럼 날카로운 파란 눈을 가진 신사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귓속에 울리던 내 심장박동이 조금 더 빨라졌다. 내 최종 면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월가를 들어가며:
프롤로그 (01) / 3학년 가을학기 (02) / 위험한 구애활동 (03) / 3분짜리 이야기 (04) / 선배와의 통화 (05) / 두 가지 선택 (06) / 첫 인터뷰 (07) / 레디 인터뷰어 원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