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 "엑시덴탈 유니버스"에 대한 독후감을 썼었는데,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오늘은 그 책 내용을 가지고 '책수다'를 떨어볼까 한다.
과학자들의 믿음
종교에서 ‘믿는 자들’은 증거가 없어도 믿는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는 성경 말씀처럼 말이다. 하지만 과학은 다르다. 과학자들은 직접 보고, 만지고, 실험하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증명이 돼야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불확정성 원리’나 ‘이중 슬릿 실험’과 같은 양자역학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과학자들이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처럼, 마치 ‘믿는 자들’처럼 얘기하는 것 같다.
사실 보통의 사람들은 ‘이중 슬릿’ 실험이니 뭐니 하며 증거를 들이밀어도 “말도 안 돼. 어떻게 입자가 파동이 되니? 어떻게 두 개를 동시에 통과하니?”라며 안 믿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실험 결과만 있으면 안 믿기는 일들도 믿는다. “내 말이 안 믿기겠지. 하지만 이건 진짜야. 내가 직접 (실험해) 봤어.”하며 말이다. 마치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하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앞에서 “내 말이 안 믿기겠지. 하지만 이건 진짜야. 내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 봤어.”하고 말하는 예수님의 제자처럼. 과학과 종교는 전혀 다른 분야인 것 같지만, 이럴 때면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지 않나 하고 느껴진다.
어쩌면 과학자들이 ‘믿는 자들’ 이기 때문에 ‘힉스 입자’도 찾아낸 게 아닌가 싶다. 예전 과학자들은 왜 어떤 입자는 질량이 있고, 빛과 같은 어떤 입자는 질량이 없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신의 입자 ‘힉스’가 존재할 것이라는 결론(가설)에 도달했다. 이 힉스 입자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과학자들은 그 입자를 찾아 반지 원정대에 버금가는 대여정을 시작했다.
힉스 원정대
보석함의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보석함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망치로 두드리거나 벽돌로 내리쳐서 보석함을 깨뜨리려 할 것이다. 그래야 속에 있는 보석을 찾을 수 있으니까. 원자보다 작은 입자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자를 깨뜨려야 한다. 그런데 원자는 굉장히 단단해서 그걸 깨뜨릴 수 있는 '망치'는 없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똑같이 단단한 두 개의 '원자'를 서로 부딪혀서 깨뜨리는 것이다.
손으로 던지는 속도 가지고는 원자가 부딪혀도 깨지지 않을 것이다. 속도를 더 높여야 한다. 마주 달려오는 자전거 두 대가 부딪힌다 한들 기껏해야 바큇살 정도만 부러질 뿐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차 두대가 부딪힌다면? 차가 많이 찌그러질 것이다. 차가 가속을 더 많이 할수록 더욱 세게 부딪힐 것이다. 원자를 부딪힐 때는 '입자 가속기'를 사용한다. 원자가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빠른 속도로 슝 달려서 서로 부딪힐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든 것이다.
힉스 입자를 발견하는 과정은 이렇다. 입자 가속기에서 두 개의 입자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충돌시킨다. 그러면 마치 폭발이 일어나듯이, 커다란 에너지가 생기고, 작고 새로운 입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입자를 충돌시켜서 깨뜨리는 게 쉬울 리 없다. 전자-양전자를 충돌시키는 그 입자 가속기는 둘레가 무려 26.7km이다. 트랙을 빠르게 달리는 레이스 카 두 대를 충돌시키듯, 이 어마어마한 가속기 안에서 입자를 충돌시키며 힉스 입자를 찾는 것이다.
두 입자가 충돌할 때마다 힉스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충돌을 수십 억 번 반복하면 그중에 한 번은 어쩌다가, 힉스 입자가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 힉스 입자를 캐치해내야 한다.

출처: 여기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CERN)에는 지하 100m 깊이에 건설된 거대 강입자 충돌기(LHC)가 있다. 둘레는 무려 27km.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힉스 입자를 감지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힉스 입자는 질량이 크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생겨난 지 1조(兆) 분의 십억 분의 1초 만에 더 가벼운 질량을 가진 다른 입자로 붕괴해버린다.1) 힉스 입자를 바로 감지해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 그래서 그 입자가 붕괴돼서 만들어진 다른 입자들을 통해 흔적을 찾아내기도 한다. 저렇게 커다란 입자 가속기에서 입자들을 충돌시키면서, 엄청난 비용과 어마어마한 노력을 쏟아부으면서도 과학자들은 언제 힉스 입자를 발견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힉스 입자를 찾아 나선 지 20여 년이 지난 후인 2012년, 드디어 힉스 입자를 발견해내고야 만다.
커다란 입자 가속기, 20여 년이 넘는 시간, 수십 억, 수천 억 번을 넘는 입자들의 충돌. 이 기나긴 여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건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힉스 입자가 존재한다는 걸,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걸 (어찌 보면 종교적일 정도로) ‘믿었기’ 때문에 결국은 힉스 입자를 발견해낸 것이다.2)
존재함에 감사하며
가끔 인생이 덧없다 느껴질 때가 있다. 이룬 것도 하나 없고, 잘 하는 것도 하나 없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것인가. 내가 태어난 의미는 무엇일까. 길고 긴 우주의 역사에 비하자면 한낱 점에 불과할, 겨우 백 년을 살다 가는 인생. 나 하나의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데 힉스 입자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인생도 한낱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백 년 사람 인생에 비하자면 1조(兆) 분의 십억 분의 1초만 살다 가는 힉스 입자는 그 점에 붙은 티끌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 수십 년간 애를 태웠다. 힉스 입자가 그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과학자들은 열광했다. 힉스 입자는 스스로 ‘길고 긴 우주의 역사에 비하자면 한낱 점에 불과한 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아는 사람들은 안다. 그 존재 자체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어쩌면 우리도 모두 힉스 입자와 같을지 모른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각주
1)
"엑시덴탈 유니버스" 중에서
It turns out that the Higgs particle is a shy little fellow. It takes roughly a trillion collisions between protons to coax one Higgs into existence, and, once created, the particle hangs around for less than a billionth of a trillionth of a second before changing into other subatomic particles. Clearly, a particle with such a fleeting acquaintance cannot be spotted directly. (p. 69)
힉스 입자는 굉장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녀석이다. 두 양성자를 대략 1조(兆) 번 가까이 충돌시켜야만 겨우 힉스 입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힉스는 1조(兆) 분의 십억 분의 1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다른 입자로 붕괴되어 사라진다. 이러니 힉스 입자를 직접 감지하고 관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2)
사실 나도 힉스 입자가 뭔지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다. 이 글은 힉스 입자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과학 글이 아니다. 다만 '힉스 입자가 과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였고, 과학자들이 오랜 기간 힉스 입자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 정도만 알면 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덧
이번 주까지는 일이 바빠서 글도 자주 못 올리고, 다른 분들 피드를 찾아뵙는 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 짐작하시겠지만 "이지스팀잇()"에서 준비하는 "초보 가이드"의 출간을 위해 막바지 교정 작업이 한창입니다. 교정 작업이 마무리되면 다음 주부터는 좀 더 활발히 스팀잇 활동을 하려 합니다. 저 잊지 말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