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선배들과 소모임 할 때 썼던 글을 가져왔습니다.
단편이라고도 하기 뭐한... 조악한 짧은 글이요 ^^
그때 썼던 글 목록을 보니 엄마 이야기, 연애 이야기가 대부분이네요.
저도 이번에 안 건데요.
지어낸 이야기에도 우리 엄마가 보여서~
또 한 번 아... 딸은 어쩔 수 없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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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엄마였다.
“밥 먹었어?”
“아니, 엄마는?”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알았어. 역에서 내려서 뭘 좀 사갈게.”
“그래, 이따 봐.”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전혀 음식을 조리 할 수 없다고 했다. 전기밥솥이 해주는 흰 쌀밥조차도. 엄마의 머릿속에서 요리라는 회로만, 음식이라는 회로만 끊어진 것처럼.
급식이 일반적이지 않던 그 시절, 내 도시락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우리 엄마 반찬 한 번 먹어보겠다고 기웃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도시락 임자인 나는 되레 맨 밥을 우걱우걱 쑤셔 넣곤 했다. 남자아이들이 몰래 꺼내먹는 일도 잦았다.
엄마는 서울에서도 일부러 찾아와서 사간다는 반찬가게 주인이었다.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고 만든 반찬과 젓갈들은 담백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었다. 내 고향에서는 ‘용 들어간 보약으로도 안 되면 그 집 젓갈을 먹인다.’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였다. 엄마 손맛의 기원이었던 외할머니. 엄마의 반찬가게를 처음 시작한 사람.
외할머니는 당신의 음식 재주를 싫어했다. 외할머니는 손맛 뿐 아니라 손재주도 뛰어나서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생소하던 그 시절부터 맛있는 음식을 더욱 맛있어 보이게 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이래저래 손으로 하는 일 대부분을 잘 했다고 보면 된다. 외할머니는 그 손재주가 여자 팔자를 가난하게 한다고 믿었다. 젊어서부터 일을 해도 해도 가난한 것이 손에 붙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우리 엄마를 보면 그건 미신이거나 잘못된 판단이었지만.
엄마가 처녀 시절 공무원으로 일했던 것도 반찬가게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외할머니가 반강제로 시킨 것이었다고 한다. 인근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엄마가 결혼허락을 받으러 찾아왔을 때도 가장 먼저 한 말이 “집안에 식당 하는 친척이 없느냐”는 거였다고 하니 어지간히도 싫었나보다.
참 슬프게도 외할머니의 노력은 아버지의 실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 시절에는 보증을 잘못 서서 망한 사람들이 흔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집이 없어졌다. 외할머니는 어떻게든 다시 집을 찾으려는 엄마의 노력을 외면하지 못했다. 반찬 만드는 비법을 알려주면서도 ‘집만 다시 사면 가게 접으라.’고 덧붙이곤 했다.
엄마는 의외로 사업수완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장사를 하면서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엄마는 곧 아빠의 수입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오히려 더 넓은 집을 사기까지 이년 반이 걸렸다. 반찬가게가 점점 성황을 이루는 것과 비례해서 외할머니의 근심은 깊어졌다. 장사가 잘 될수록 오히려 더 불안한 표정을 짓곤 했다.
할머니는 엄마와 아버지가 보내준 효도관광에서 돌아오고 사흘 뒤에 쓰러졌다. 건강하던 사람이 쓰러지면 한순간에 간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쓰러지고 일주일 후에 돌아가셨다. 엄마에게 별다른 유언은 없었다. 다만 “죽기 전에 좋은 데 보여줘서 고맙다. 손 한 번 잡아보자”라고 했는데 삼십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엄마 손을 놓지 않았다.
엄마의 팔꿈치 아래서부터 손바닥까지를 수십 번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리더니 ‘아직은 아니다. 손 놓지 마라’ 하며 또 쓸어내기를 반복했다. 죽기 전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 치고는 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할머니는 엄마 손바닥 위에서 무언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고는 ‘이제 됐다’ 며 미소 지었다.
그날 밤에 외할머니는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장례가 끝난 후에야 엄마가 이상해진 것을 깨달았다. 반찬이 되었어야 할 재료들은 썩어서 버려야 했다. 일시적이겠거니 하는 마음에 한동안 가게를 닫고 쉬기로 했는데 삼년이 가도 사년이 가도 다시 열지 못했다. 가게가 없어진 후에 엄마의 운명은 외할머니의 바람대로 흘러갔다. 엄마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게 됐다. 가세의 확장이 중단된 것 빼고는 그럭저럭 잘 살아졌다. 가끔 “다시 음식을 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내가 죽을 때가 된 것”일 거라고 하는 것이 입버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