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일.
주말, 방 깊이 들어온 햇빛을 맞으며 깨어나려는 정신을 애써 누르며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방광의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는 달아나는 잠을 더 이상 잡을 수 없었다. 침대 커버와 이불 사이의 얇은 공간이 주는 따스함을 포기하기는 너무 아까웠기에 두 다리를 살짝 겹친 채 돌아누워서 오늘은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했다.
짧은 시간에 여러 장면들이 스쳐 갔으나 가능성이 너무 희박한 것들-간밤에 언브레이커블 코인(UNB)이 두 배 폭등해서 내 계좌가 본전에 가까워졌다거나, 갑자기 집사람이 ‘여보, 평일에 힘들었지? 주말에 혼자 제주도라도 다녀와.’라고 말하는 장면-은 얼른 지워버린다.
그리고 머릿속에 남은 게 돌잔치다. 집사람의 어머니의 언니의 아들. 혹은 내 배우자의 사촌. 1년에 많아야 두 번 만나게 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집사람보다는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나한테 반말을 하는, 평소에 가슴을 약간 뒤로 젖힌 채 팔을 어깨넓이보다 살짝 넓게 벌려 팔자걸음을 걷는 그 사람의 아들이 태어난지 만 1년째 되는 날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몇 가지 영상이 머리를 스친다. 왠지 음성으로도 옮길 수 있을 법하다.
아빠, 가게놀이, 아빠, 미용실놀이하자.
씻기 싫어 지금 목욕 안할래.
손님, 죄송합니다. 지금 만차입니다.
젊은 사람이 술 그것 밖에 못 먹나. 쭉 들이키게.
여보, 당신 양복에 고추장 묻었네?
아빠, 언제 집에 가? 지겨워.
방광이 미친듯이 노크를 하는 탓에 생각을 끊고 거실로 나간다. 일단 말라 비틀어진 군고구마를 반으로 꺾어 입에 넣고 샤워를 시작한다. 씻고 나오니 방에서 집사람이 아이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보고 있으니 기가찬다. 언젠가 잠시나마 진화론에 대한 내 믿음을 흔들었던 글귀가 떠오른다.
아이는 집사람이 꺼내 준 옷들을 기어코 다 던지고 다시 옷장을 뒤적거린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아이는 세명 모두가 만족하는 나름의 패션을 완성했고, 나는 지쳤다. 뷔페 말고 그냥 라면 한 봉지에 파, 청양고추 1개, 떡, 계란 1개를 넣어 먹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예상했던 많은 장면들이 현실이 된 후, 꿈과 희망이 가득한 그곳으로 향했다. 홀 내부의 10여개 남짓한 방에서는 갓난아기들이 미리 직업을 부여받고 있었다. 돈, 청진기, 마이크, 판사봉, 양궁 활. 각각 부자, 의사, 연예인, 법조인, 국가대표 스포츠맨을 의미한다니 선택항은 5개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직업이 약 1만개가 된다고 하던데 나머지 9995개의 직업은 누가 갖게 되는 것일까.
내가 배정받은 방 안에서는 여러 덕담과 전문사회자의 농담이 오가고 있었고, 난 홀을 어슬렁거리며 아이와 집사람이 먹을 음식을 이것저것 담는다. 두어 번 배달을 다녀온 후 내가 먹을 음식을 담는다. 어느 뷔페를 가든지 가장 맛있는 건 잔치국수다.
풍부한 미원 향을 음미하며 김을 한 주먹 담으면 내가 좋아하는 국수가 완성된다. 집사람은 내가 먹는 이 국수를 ‘김 국’이라 부른다. 이게 왜 잔치의 상징이 되었나 생각하며 ‘가늘고 긴’ 국수를 세 그릇 먹는다.
어느새 주연배우가 입장할 차례가 되었는데 연출이 자못 드라마틱하다. 잠깐의 소등, 친지들의 영상편지, 아이 엄마의 감격 섞인 육아 소감 등의 동영상 상영. 그리고 돌잡이.
맥주 두 병과 사이다 한 병, 그리고 국수 세 그릇과 양념범벅의 고기 덩어리들. 배부른 주말은 이렇게 석양 너머 흘러갔고, 오늘의 주인공을 축하하기 위해 낸 봉투는 6:4의 비율로 식당과 주인공이 나눠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