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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지인들을 내버려 두고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다. 어릴 적부터 친구집에서 자는 날이면 항상 친구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럼 친구 몰래 방을 정리하고, 짧은 편지를 남기고 집으로 오곤 했다. 뒤늦게 잠에서 깬 친구들은 내게 미안해했지만, 친구를 배려했다기보단 타인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기 싫은 마음이 더 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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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술을 왕창 먹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지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세신가 네신가 겨우 도착했을 땐 모두 수아레즈와 호날두를 보고 있었다. 나도 집중해서 보고 싶었는데, 잔뜩 취해 그놈이 그놈 같아 보였다. 십 분쯤 보다가 어디 빈 소파에 가서 잠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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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갔던 뒷풀이는 꽤나 근사한 자리였다. 비싼 와인과 고급 안주가 즐비해 있었다. 원로 예술가라는 말이 어울리는, 전임교수라는 직함도 있을 것 같은 어른들과 함께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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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나는 파격적으로 어린 축에 속했기 때문에 이목이 쏠렸다. "공연 잘 봤어요.", "음악 좋았어요."와 같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분위기는 좋았지만 나는 원래 그런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방긋 웃으면서도 기분이 마냥 좋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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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참 좋았다. 주위도 고요하고, 안주도 맛있고, 작품에 관한 이야기도 끝없이 나눌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딱 보기에도 깐깐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어르신이 와인잔을 들고 내가 있는 테이블로 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말이 나올 거라는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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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마자 대뜸 작품에 관한 몇 개의 질문을 하고선 짧게 두 마디 정도 코멘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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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부터 들인 노력에 비해, 또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에 비해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사람들은 늘 내 음악이 좋다고 했고, 때로는 천재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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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 나는 부족함으로 똘똘 뭉친 열등감 덩어리였다. 나는 매일 진짜 '천재', 진짜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또 천재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을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는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면 오히려 시니컬한 감정이 생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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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말은 길지 않았지만, 본질을 꿰뚫었다. 치부를 들킨 기분이 들었다. 그간 수많은 칭찬을 받아왔지만, 적확한 지적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젠체하던 나는 어린아이가 돼 그분 앞에서 속마음을 구구절절 털어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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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이미 막차가 끊긴 지는 한참이었지만,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몇 안 되는 사람들과 바로 옆에 있는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넓은 테이블에서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좁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좀 더 내밀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얘기할수록 그분의 어조는 적나라해졌고, 그 말들은 송곳이 되어 나의 가장 아픈 부위를 콕콕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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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기운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떤 감정인지 확언할 순 없지만, 그분의 지적 때문은 아니었다. 감정을 추스르곤 이렇게 말했다.
"저 정말 너무 잘하고 싶어요.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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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 상을 받았다. 처음 음악으로 받게 된 상인데 기분이 그다지 좋진 않았다. 최우수 음악상이라는 이름도 웃겼고, 무용 분야에서 받은 상이기에 더 와닿지도 않았다. 늘 들어왔던 "잘한다."는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다만 이 상을 계기로 가을에 열리는 무용제에 이 작품을 다시 올리게 되었다. 그분은 도와달라는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고집스러운 표정을 풀고 슬쩍 웃으셨다. 나는 만취해서 이번엔 정말 잘 해보고 싶다고, 늘 그래왔지만 이번엔 정말로 잘하고 싶다고,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