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의 계절이다. 지인이 모과가 열린 사진을 보내줘 알게 되었다. 얼마간 살아오면서 모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다.
지방에 가고 있다. 앞의 일정이 늦게 끝나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가야 했다. 그럴 거면 KTX를 탈 걸 그랬나? 버스에서 보내는 시간을 작업 시간으로 남겨뒀다. 사소하게 밀린 일을 처리하는 시간이다.
타자마자 피곤이 몰려와 눈을 감고 삼십 분쯤 있었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안 오고, 일을 처리할 만큼 맑은 정신이 아니라 글을 쓴다. 잠에 들지 못하는 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아서다. 눈을 감으면 해야 하지만, 여기선 할 수 없는 일들이 평소보다 더 선연히 떠오른다.
최근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해가 지날수록 더욱 안 좋아짐을 느낀다. 몇 주 째 두드러기가 낫질 않는다. 병원에 가야 하나? 어제부터는 입술이 트고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물집의 계절도 모과의 향과 함께 오고 있다. 저번 주부터는 비타민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공연은 세 개... 각자 다른 의미로 큰 공연이다. 잔뜩 예민해야 하는데, 고작 악보를 미리 꺼내둔 것으로 위안을 삼게 된다. 연습할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있다. 모두 해봤던 곡이라는게 나를 버티게 해준다. 새로운 곡을 연주해야 했다면......
최근 이성의 끈이 끊어졌던 날이 있다.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 원인은 내게 있었지만, 자꾸 타인에게 돌리고 싶어졌다. 모든 일의 시발점은 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던 것이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고, 낯선 곳에 가야 했고, 짐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마음이 평소보다 더 급했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것이 오랜만이라 한 편으론 재밌기도 했다. 어디까지 이성으로 감정을 다룰 수 있는지, 그 한계점을 시험해보는 기분이었다. 타인에겐 티를 안 내려 노력했지만, 어느 정도는 느껴졌을 것이다. 미묘한 날섬이었겠지만, 그것을 느꼈을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사과를 구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처리해야 할 일은 사소한 것들이다. 드리퍼와 필터 사기, 겨울 신발 사기, 저녁에 돌아갈 버스 예매하기, 잃어버린 안경 찾거나 새로 사기. 그 사실을 얼른 결정하기. 밀린 연락에 답장하기. 피아노 알아보기.
이사 오면서 오래된 드리퍼를 버렸는데, 그 사실을 잊고 원두를 샀다. 이미 몇 주가 지나 그 원두는 쓰지 못하게 됐다. 좋은 걸 사려고 이것저것 알아보다 미루게 된 건데, 그럴 바에야 원래 쓰던 드리퍼와 같은 걸 그대로 사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동생들이 선물해준 매트가 저번 주 도착했다. 나는 가죽이나 방수가 되는 천으로 된, 너무 높지 않은 단색의 매트를 구매하려고 했는데, 애들이 선물해준 매트는 필요 이상으로 푹신했고, 화려한 꽃무늬 천으로 되어있었다.
처음 매트를 꺼냈을 땐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애들이 사주지 않았다면 지금 해야 할 일에 매트 구매가 포함돼있었을 것이다. 그럼 오늘도 딱딱한 바닥에서 일어나야 했을 것이다. 푹신한 매트는 푹신한 대로, 또 천으로 된 건 또 그것 나름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닐지 모른다.
그럼 내가 살 드리퍼가 유리로 되어있는지, 스테인레스로 되어있는지, 플라스틱으로 되어있는지는 내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커피를 내릴 수 있는 드리퍼가 집에 있기만 하면 되는게 아닐까?
나는 지금 어딘가로 향하는 버스 안에, 도로 위에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버거워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리고만 싶다.
'내일이 없단 듯' 살고 싶다. 11월이 오면 그럴 수 있을까? 지금 해결하지 못할 고민을 막연히 미루는 건 아닐까? 원하는 대로 내일이 없다면 정말로 행복해질까? 내일이 있어 지금이 행복한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위태롭게 서 있기. 어쨌건 버티면 끝까지 서 있게 될 것인지, 비틀거리다 발목을 접질릴지, 그래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피하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아름다워서 가혹한 가을이다. 어쩌면 내 이성의 끈은 진작 끊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분간은 끊어진 끈이라도 붙잡고 있어야만, 서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