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회화 포스팅 아니다. 여행기다.
「굿모닝 러시아」 는, 미국 최초의 핵잠수함 노틸러스 호가 미국 군부에 송신한 전보 "굿모닝 USA"에서 따왔다.
마치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군부가 로마노프 왕가를 붕괴시키기 위해 보낸 레닌처럼, 방문 자체가 그 나라를 관통하는 탄환이나 핵잠수함 같은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내 경우는, 길을 가다가 스킨 헤드에 맞아죽는다고 해도 신문에 한 줄 실리지도 않을 일개 관광객의 방문에 불과하다. 당연히도 위의 사진처럼 푸틴이 나를 초빙한 것도 아니다. 과대망상증의 흔적 정도로 치부해두자.
나는 원래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번째. 내게는, 스스로를 철학자 칸트나 대항해시대의 지도제작자 메르카토르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으로 해석하는 허세가 있다. 요컨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음에도 세계의 본질을 더 명확히 꿰뚫을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 말이다. 물론 이건 진지한 이유는 아니다.
두번째. 나는 튀기 좋아한다. 내가 변호사가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인문대학교의 다른 야심 없는 동기들과 구별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그냥 1년 어학 연수를 가 적당히 인생을 즐기다가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당연한 코스로 생각하며 살곤 했다. 내가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야심가 타입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 역설적으로 내가 법대생이거나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즐비한 S대의 경영대생이었다면 오히려 좀 더 안정적인 코스를 밟으려 했을 것이다. 다수의 반대편에 서려는 것은 내 본능 중 하나다. 그런 관점에서, 만약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문화적 금기었다면 나는 오히려 더 해외를 많이 방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세대는, 오히려 휴가철에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을 인생의 낭비로 본다. 그것이 싫었다. 물론 두번째 이유 역시도 막 진지하지는 않다.
세번째. 여유가 없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바쁘지 않은 사내변호사였고 해외여행이 부담될 만큼 적은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휴가 시즌을 자기계발에 활용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먼저 항구적인 자유와 자립을 획득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금세 충분한 돈과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휴가 시즌에 북적이는 거리가 아니라, 가장 날씨가 낭만적이고 한가할 무렵, 호젓하게 그 도시의 모든 것을 즐겨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삶을 꿈꾸었다. 그래서 해외여행 따위는 좀 미루어두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고 휴가 기간을 재테크 공부를 하거나 소설을 집필하는 데 썼다. 하지만 그렇게 거진 반십년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나는 부유하지 않으며, 내 이름으로 된 책은 고사하고 완성한 저작조차도 거의 없다. 기왕 그랬다면 앞으로 1, 2년 사이에 드라마틱한 반전이 생기지도 않겠지. 차라리 바람이나 쐬러 다녀오는 것이 더 생산적일 듯 싶다. 이것은 아래 이유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해외여행을 가지 않았던 것에 대한 충분한 대외적 설명이 된다.
네번째, 내가 해외를 나가면 어떻게 시간을 쓸 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나 같은 가망 없는 호색한(好色漢)은 분명 여자를 찾을 것이다(매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 부디 오해하지 말아주길). 현지 여자들에게 말을 걸거나 소개팅 어플을 열심히 돌려보는데 시간을 낭비하겠지. 한국에 온 여자들이야 국적을 불문하고 그래도 한국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서 비교적 만나기 쉽다만, 옷도 후줄근하게 입은 잘 생기지도 않은 동양인 남성이 거기서 할 뻘 짓이 미리 창피했다.
실은 세번째보다도 네번째가 더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번에 러시아 여행을 감행하는 것은, 이번 여행에 한정해서는 이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다. 젊은 날을 엉망으로 쓰며 살았던 훈장으로 어쩌다 보니 러시아에 나를 가이드해 줄 여자 (사람) 친구가 세 명이 생겼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을 잘 믿지는 않지만 그녀들을 믿고 간다. 브라질에 있는 니키나 페루에 있는 켈리, 또는 콜롬비아에 있는 벨라를 보러 가지 않는 것은 그래도 러시아 사람들을 남미 사람보다는 좀 더 신뢰하기 때문이고, 뉴욕의 셀리네를 보러 가지 않는 것은 사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해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그리고 사마라. 아름다운 세 곳의 고도(古都)와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할 이 여행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썩 낭만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실은 무슨 장르가 될지조차도 잘 모르겠고 어쩌면 크게 재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솔직하게 글을 쓰는 것 같지만 모든 걸 적지는 않으니까. 일단 가보자.
내일 열두시 출국한다.
T.M.I다만 지금껏 방문했던 국가는 미국, 중국, 인도, 일본, 홍콩이다. 여기에 러시아를 추가한다. 여행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게 짧았던 홍콩을 제외하면 묘하게 핵이나 항모를 보유한(또는 보유했던) 국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