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업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글이 가엾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 중에 제일로 저열한 것은 기자가 아닐까. 기자는 그저 일어난 일을 적을 뿐이다. 거기에 비교하면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소설가는 얼마나 대단한가.
시인, 아 시인의 위대함은 또 어떻게 다 말로 할 것인가.
기사는 노출되자마자 휘발한다. 독자가 한 꼭지의 기사를 읽는데 몇 분, 아니 몇 초를 쓸까. 한 꼭지의 기사를 두 번, 세 번 읽는 독자가 있을까. 아니 한 번이나 제대로 읽는 독자가 몇 명이나 될까.
몇몇 문학은 영생한다. 나는 요즘 프란츠 카프카의 ‘성’과 요 네스뵈의 ‘팬텀’을 읽는다. 카프카는 1920년대 초반에 성을 썼다.
네스뵈는 지난해 연말 팬텀을 출간했다. 여전히 사람들이 스티븐 킹의 초기작을 찾아 읽는 것처럼, 네스뵈의 작품도 오래도록 읽을 것이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팬이 있다. 그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몇 번이고 읽고, 그 희곡을 극화한 연극을 몇 번이고 본다.
나는 소설가 김훈을 좋아했다. 그의 문장을 훔치고 싶어서 소설 ‘칼의 노래’를 베껴 썼다. 세상에 기사를 베껴 쓰는 사람은 기자 지망생을 빼고는 없을 것이다.
나는 욕망한다. 나의 글이 오래도록, 여러 사람에게 읽히기를. 나는 나의 깜냥을 안다. 나는 아마 소설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도 꾸역꾸역 200자 원고지 5장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