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목요일이다. 금요일 밤과 토요일 밤에 마실 술을 사야 할 목요일이다.
배를 증류해 만든 술이라니. 내 일찌기 쌀, 보리, 옥수수 등으로 빚은 술은 마셔봤어도 배로 만든 술은 못 먹어봤다. ‘문배술’이 배 맛이 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문배술의 원료는 수수다. 다만 야생 배 맛이 나는 것일 뿐.
배상면주가에는 ‘아락’이라는 증류주 시리즈가 있다. 각각 배, 복분자, 오디, 고구마로 빚었다. 고민하다가 배 아락을 골랐다. 유명한 고창배로 빚었대서 한 번, 문배술과 얼마나 다를지 궁금해서 또 한 번 마음이 동했다.
술맛에 앞서 술병 디자인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술병의 모양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술의 본질은 맛이지만, 잘생긴 병은 술의 맛을 돋워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락의 생김새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렇게 젊고 감각적인 전통주 술병이라니. 아락은 투명한 병에 흰색 라벨을 붙이고 원재료를 그려 넣었다. 그 위에 단정한 필치의 한글로 ‘아락’이라고 새겨 넣었다. 좋다.
이제 본질, 맛을 볼 차례다. 투명한 잔에 술을 따랐다. 달콤한 배의 냄새에 끈적한 단내가 섞였다. 잔을 슬쩍 기울여 흔들었다. 술잔 벽을 타고 술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점도가 높아 보였다.
배 아락을 한 모금 머금었다. 배의 풍미가 깊고 달았다. 혀에서 달았던 술은 목구멍을 향하면서 달아올랐다. 뜨거운 아락이 부드럽게 위장으로 미끄러졌다.
술이 목젖을 통과하는 찰나 그 화기(火氣)는 콧구멍을 향해 내달았다. 이 술이 알코올 도수 40도짜리 독주였음을 실감한다. 숙성하지 않은 술이므로 다층적이거나 화려하지는 않다. 대신 저돌적인 맛이 있다. 터프하다.
진한 향과 다디단 맛에 독하기까지 해 스트레이트로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물에 희석해 마시면 좋다. 나는 1대 1의 비율로 섞어 마셨다.
희석한 배 아락은 한결 순하다. 순한데 썩 맛이 괜찮다. 알코올의 기운이 약해져 배 아락의 독특한 풍미가 오히려 선명해진다. 배 아락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이것조차 독하면 술 1대 물 2도 나쁘지 않다.
배 아락 하이볼도 괜찮았다. 나는 하이볼 잔에 얼음을 채우고 술 1대 탄산수 4로 섞어 만들어 먹었다. 톡톡 터지는 탄산 알갱이 사이로 달달한 배향이 올라왔다.
기분 좋게 먹고 성분표를 봤다. 나는 배 증류 원액 100%일 줄 알았다. 아니었다. 배 증류 원액 88%였다. 나머지는 정제수와 설탕이었다.
설탕. 설탕이라니. 나는 술을 마시면서 이 단맛이 배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했었다. 설탕의 단맛이었다니. 조금 배신감이 들었다.
375㎖ 한 병에 2만5000원이다. 다시 사 먹지 않겠다. 만약 배 원액 100%였으면 ‘다시 사 먹겠다’고 썼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궁금하니까, 나머지 아락도 언젠가 먹고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