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글렌모렌지 시그넷을 시음한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맛있네”라라고 했다. 그것은 허락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한 병 주세요”라고 공항 면세점의 글렌모렌지 시음 직원에게 말했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계산대 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술을 팔아서 그 또한 기뻤을 것이다.
이 한 병을 팔면 그는 얼마를 손에 쥘 것인가. 소정의 인센티브라도 떨어지는 것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내의 허락으로 나와 더불어 그가 기뻐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시그넷은 특별한 위스키다. 250도 고열로 로스팅한 초콜릿 몰트를 별로의 디자이너 캐스크에서 숙성한다. 셰리 오크에서 추가로 숙성한다.
이 지난한 과정이 시그넷의 독창적인 풍미를 완성한다. 나는 아직 글렌모렌지 오리지널의 맛을 모른다. 오리지널을 맛보지 못했는데, 변종부터 맛봐도 괜찮을까.
걱정은 시그넷을 시음하는 순간 알코올과 함께 휘발됐다. 원래 내가 면세점에서 사려고 했던 것은 다른 술이었다. 내가 산 것은 시그넷이었다.
거짓말 좀 보태서 여행하는 내내 마음은 짐가방에 가 있었다. 귀국해서 짐을 풀자마자 나는 시그넷부터 마셨다. 아내가 나를 보고 혀를 찼다.
시그넷 박스는 크고 단단하고 아름다웠다. 박스를 열자 시그넷이 자태를 드러냈다. 진갈색 병은 풍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상부로 올라가다가, 어깨에서 원을 그리며 꺾였다. 목이 와인병처럼 길었다.
병 중앙에 글렌모렌지의 문양과 이름을 금빛으로 새겼다. 스코틀랜드 전통 문양이라던가. 티타늄색 금속이 주둥이와 뚜껑을 장식했다. 손에 꼽을 정도로 잘생긴 술병이었다.
시그넷을 따른다. 짙은 호박색이다. 코를 박는다. 알싸한 알코올 기운이 캐러멜, 바닐라 냄새와 뒤섞여 콧구멍을 휘감는다. 아, 냄새에 취한다.
한 모금 머금는다. 민트향이 퍼진다. 찰나의 순간 상큼한 오렌지, 따뜻한 계피의 상반된 풍미가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혀를 따라 술이 이동한다. 목구멍이 달아오른다.
화기(火氣)가 콧구멍으로 빠져나간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짭조름하고 매콤하다. 에스프레소, 다크초콜릿 맛이 난다. 피니시는 쓰고 달고 짜고 맵다. 이 풍미가 오래간다.
경험적으로 풍미가 독특한 위스키들은 온더록스에서도 훌륭했다. 의외로 온더록스 시그넷은 별로다. 매력적인 향기가 냉기 뒤로 숨는다. 온더록스로 먹기에는 아까운 술이다.
냉장고에서 생(生)초콜릿을 꺼냈다. 시그넷을 마셨다. 피니시를 음미하다가 초콜릿을 베어 물었다. 다시 시그넷을 조금 마셨다. 녹아내린 초콜릿이 시그넷과 한 몸이 됐다. 나는 기뻤다.
주류전문점에서 700㎖ 한 병에 약 35만원. 면세점에서는 160달러 내외. 알코올 도수 46도. 다시 사 마실 의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