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뉴비 철학자입니다.
오늘은 예전에 썼던 에세이 하나를 포스팅합니다.
이 시대에 글이 소비되는 양태와 철학이 취할 자세에 대해 쓴 글입니다.
앞으로도 제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 중 공유하고 봉인할 만한 글들을 골라
'철학과 문화론'을 주제로 포스팅을 사정이 닿는 한 매일 꾸준히 올릴 예정이니 주목해 주세요.
패스트푸드 철학
대학원 시절 한 사회과학도가 철학과 수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철학과 수업에서는 책 한 권을 읽는 데 시간이 참 오래 걸리는 것 같아 놀랍습니다. 사회과학대학에서는 한 학기 수업에서 푸코(Michel Foucault) 전집을 다 읽습니다!” 당시 세미나실에 울려 퍼진 놀라움의 분위기가 아직도 선하다.
물론 이런 수업 방식이 사회과학대학의 분위기를 다 전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한 대강의 분위기를 전달해 주었던 것 같기는 하다. 나도 사회과학대학 수업에서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저 말을 들으면서 딱히 떠올랐던 표현은 아니지만, 그 때의 느낌을 지금 표현하자면 이렇다. “철학이 뭐 패스트푸드인가?”
특히, 아직도 그렇긴 하지만(현재는 많이 나아지긴 했다), 당시에는 푸코의 책이 한국어로는 물론 영어로도 제대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저 사회과학대학 수업은 불어 텍스트로 진행되지도 않았다고 했다. 당시 철학과 세미나실에서 퍼진 놀라움은 실은 “그런 것이 과연 대학원 수업이었나?” 하는 쪽에 가까웠다. 도대체 읽은 것은 무엇이고 배운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그런 독서 방식으로는 줄거리 파악도 불가능했을 테니.
제대로 공부를 하려고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남의 책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독서라고 부르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지적 허영이고 시간 낭비이다. 저 수업에서는 이른바 푸코 철학을 사회과학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묻고 따졌을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푸코 철학이 유용한지 아닌지를 진지하게 고민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을 때 마지막을 수습하기란 불가능하다. 텍스트 읽기가 안 되었을 때 그것을 적용하거나 수용한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오독도 일종의 창조라는 말을 하면서 이 사태를 무마하려 드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오독의 차원이 저열해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사태를 잘 정리한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하겠다. “나는 이황의 책이든 이이의 책이든 니체나 데리다 혹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이든지 간에, 한자나 외국어로 쓰여 전문가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서적은 우리의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모든 책이 우리의 책이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할 방법은 창작이 아닌 한 번역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때 왜 번역이 중요하냐고 반문하는 것은, 나에겐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짜장면을 시켰는데 우동이 나온 거다. 칸트의 책을 샀는데 칸트가 들어 있지 않은 거다.”(이무영)
철학과, 또는 좀 넓게 말해 인문학의 책읽기, 말하자면 글자 하나하나를 소중히 짚어 가는 독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저들은 텍스트를 숭배한다. 고증학과 훈고학에 젖어 있는 자들이다!” 작업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꽤 오래 전에 학문하는 태도와 관련하여 공자가 했던 충고를 잊어버렸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아직도 이런 초보적인 논란이 계속 벌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특히 원전의 내용을 정확히 알자는 기본적 요구를 원전중심주의라 매도하는 경향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나는 여기서 인문학의 책읽기 방식만이 배움의 유일한 방식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허나 저 사회과학대학의 수업에 대해 말하자면, 거기에는 책을 통한 학문적 배움이 전혀 없다. 물론 몇몇 인상 깊은 구절을 개인적으로 써먹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배움이야 학문의 이름을 걸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학자라면, 또는 학자로서의 삶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일반인이 시간이나 재능이 없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여 일반인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확한 번역이나 해설 같은 일 말이다.
대학을 졸업하여 사회생활을 하게 될 일반인 모두에게 학자적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는 방식은 다 다른 것이다. 패스트푸드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요리사나 요리사가 되려는 사람이 패스트푸드를 먹으면서 요리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때로는 전문가연 하면서 때로는 놀이에 불과하다고 이중적인 몸짓을 하면서, 그렇게 요리사와 패스트푸드 점원 사이를 오가는 일이 학계에도 흔한 일이 되어 버린 듯하다.
함께 모여서 "천 개의 고원"을 일 년 넘게 읽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따금씩 듣는다. 자기 분야에서 오래 공부해 온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내가 이 책을 번역해서 아는데, 한두 쪽을 넘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들뢰즈+과타리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을 때 음반을 듣듯이 읽으라 권한다. 그리고 내가 일반 독자라면 조언을 따라 맘에 드는 좋은 대목만 읽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다. 저자들은 이 책을 바로 이 두툼한 책의 형태로 제작했다는 점이다. 즉, 안 써도 될 부분을 쓰지는 않았다. 책의 모든 부분은 나름의 유용성을 지니며, 따라서 적어도 학자라면 책을 옮기거나 해설할 때 그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렇다면 시중에 널리 퍼져 있는 저 조급증의 정체는 무엇일까? 과시욕 아니면 허영심? 나는 그것을 80년대에 생겨난 나쁜 버릇이라 진단한다. 시대 상황 탓이었지만, 당시 사회 변혁은 너무도 절박했고 그에 반해 학문 작업은 이 실천을 정당화하거나 뒷받침하기에는 너무 느렸다. 이 시차를 극복하기 위한 편법이 일어 중역과 요약 학습이라는 나쁜 습관이었고(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책이 80년대의 "철학 에세이"와 90년대의 "철학과 굴뚝청소부"였다), 그것이 일부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시의성을 상실한 오늘날까지.
철학은, 철학의 소비 방식은 물론 철학의 제작 방식도, 패스트푸드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패스트푸드 철학은 최고의 반철학적 운동이며, 철학을 살해하는 가장 세련된 음모이다. 결코 굴복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