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스,,, 말그대로 칙칙하다. 60대 초중반의 중딩 동기들 몇몇과 길을 나섰다. 모처럼 나들이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껏 모양을 냈지만 글쎄다. 별로 태가 나질 않고 우중충하다. 그러나 화색만큼은 쾌청하다. 청춘이고 싶은 표정들이다.
나이불문 나들이는 즐겁다. 반세기 전 빡빡머리로 만났던 악동들과의 소풍은 그래서 더욱 설렌다.
09:00 서울역발 강릉행 KTX에 몸을 얹었다. 李가 머릿수만큼 챙겨온 구운 계란을 돌렸다. 기차여행에 삶은 계란은 썩 잘 어울렸다. 추억을 소환하기 딱좋은 먹을거리다.
왁자지껄 목청이 높다. 승무원이 지나며 목소리를 낮춰 달란다. 경상도 보리문디들이라 '소곤소곤' 대화가 어렵다. 누가보면 싸우는줄 안다. 40년 전 경춘선 열차 타고 대성리 가고 강촌 갈때 열차안은 시끌벅적에 요란법석이었는데... 상전벽해다. 열차 풍속도도 세월따라 많이 변했다. 문화적 변화이긴 하나 웬지 모르게 삭막해진 느낌이다.
눈이 없는 황량한 겨울산야가 빠르게 스쳐 지난다. 겨울가뭄 실감이다. 산과 산은 고가로 연결되고 터널로 관통해 강릉은 이제 내 집앞이 되었다. 청량리서 열차 타고 제천이나 영주를 거쳐 강릉에 닿던 시절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둥그스름 지붕의 강릉역사를 빠져나왔다. 날씨는 포근한 편이나 하늘엔 구름층이 엷게 드리워져 있어 스산한 느낌이다. 미세먼지는 다행히 ‘좋음’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 앞 도로에 대기 중인 18인승 미니버스에 올랐다. 버스 앞유리창에 '영미컬링체험투어'라고 쓰여 있다. "이건 뭐지? 일정에 이런 건 없었는데..."
버스기사는 마이크를 들더니 "평창올림픽 때 사용했던 강릉경기장(하키, 스케이트 등)을 휙 돌아서 컬링장으로 이동하겠다"고 안내했다.
올림픽 열기가 사라진 강릉 아이스아레나엔 짙은 올림픽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사실상 방치된 느낌이다. 시설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1년에 얼추 50억은 든다하니 강원도의 고민은 클 수밖에 없을 듯.
컬링장 앞에 버스가 멈춰섰다. 버스기사가 차에서 내려 누군가와 통화하더니 벌건 얼굴로 돌아와 일행들 앞에 섰다. 뭔가 잘못된 표정이다.
"제가 사무실에서 일정을 잘못 받아 왔다. 양해바란다. 휴휴암>주문진항>오죽헌>강릉재래시장 순으로 투어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영미컬링체험투어'를 떼내고 '강릉찍먹투어'란 상품으로 바꿔 달았다. "이런~"
일정 혼선으로 낭비한 시간을 만회하려는 듯 버스는 해안도로를 미끄러지듯 내달려 휴휴암 주차장에 일행들을 토해냈다. 휴휴암은 주문진과 양양 사이 7번 국도 옆 해변가에 자리한 동해의 숨은 비경이다. 쉬고 또 쉰다하여 休休庵이던가? 잠시 짙푸른 바다를 응시하며 파도소리에 몰입했다. 사바세계의 온갖 번뇌를 떨쳐버릴 요량으로... 그러나 덕이 부족한 탓인가, 내재된 잡티들이 쉬 정화되지 않는다.
휴휴암 한가운데 동부그룹 땅이 알박혀 있어 분쟁 중이라 '休休'가 무색한 것 또한 몰입을 방해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의 참맛은 역시 먹는 재미다. 주문진포구로 향했다. 모임 회장 K가 횟집 '명진이네'를 추천했다.
주님 영접이 급한 몇몇을 위해 본격 상차림 전에 우선 데친 문어가 주안상에 올랐다. 이어 주메뉴인 오징어회와 매운탕이 등장했고 술잔이 몇순배 돌았다. 불콰해진 모습에 목청들은 점점 높아져갔다. 횟집의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앉아 그렇게 한동안 추억 소환놀이에 빠져들었다.
이어 찾은 주문진항 그리고 줄지어 늘어선 건어물 가게 앞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인파로 북새통이다. 딱히 살 것도, 아니 뭘 사야할지도 모르는 해산물 숙맥인지라 인파에 섞여 휘적대다가 꼬치어묵 마차 앞에 멈춰섰다. 과가 비슷한 몇몇이 붙었다. 비릿한 바다내음과 꼬치어묵 그리고 소주 일잔은 찍먹여행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강릉여행에서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곳, 오죽헌으로 이동했다. 오죽헌은 초딩 수학여행 이래 아마도 너댓번은 찾은 것 같다. 문화유산 해설사의 감칠맛나는 설명에 다들 귀를 쫑긋 세워 열심히 듣는다.
해설사는 청대에 먹물이 든 것처럼 반질반질 새까만 대나무 烏竹, 율곡이 어린시절 사용하였던 벼루, 간지럼 타는 배롱나무 등 자리를 옮겨가며 열심히 설명했지만 소생의 머릿속에는 '이원수'가 맴맴 돌았다.
'이원수'는 신사임당의 남편이다. 금수저였던 신사임당에 비해 남편 '이원수'의 집안은 변변치 못했다. 데릴사위로 들어와 신사임당과 사는 동안 나이 50 넘어 잠깐 하급 관직을 역임한 것 빼곤 내세울만한 게 별로 없었던 인물이다.
부인이 워낙 대단한 인물이라 이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 신사임당이 세상을 뜨자, 곧바로 첩으로 데리고 놀던 주막집 아낙을 서모로 집안에 들이기도 했다. 이처럼 이원수는 신사임당의 웬수이자, 조선시대의 셔터맨이었다.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의 발자취는 차고 넘쳤지만 셔터맨 '이원수'의 흔적은 작정하고 박물관에 들러 찾아보지 않고선 쉬 드러나지 않는다.
'보이는대로 찍고, 닥치는대로 먹자' 당일치기 '찍먹여행'의 컨셉이다. 다시 먹을거리 다양한 강릉중앙시장으로 들어섰다. 어묵고로케와 닭강정 가게 앞은 인산인해다. 기다리는 줄이 끝이 없다. 인내와 끈기 없인 맛볼 수 없다. 시장통은 젊음 일색인데 '시커먼스'가 무리지어 들어서니 그림이 쩐다.
얼른 빠져나와 인근 월화풍물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옛 철길을 없앤 자리에 컨테이너를 두줄로 길게 이어 지붕을 덮은 먹자골목이다. 메밀전병, 감자전 그리고 토속 막걸리에 발목이 잡혔다. 바삭하면서 속은 쫄깃한 감자전에 홀릭되어 해저무는 줄 모르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지막 코스인 안목해변으로 향했다. 어스름이 깔리며 해변 카페마다 불을 밝혔다. 가장 '핫' 하다는 안목 카페거리다. 커피매니아들이 즐겨 찾는다는 곳이나 커피와 별로 친하지 않은 소생의 눈엔 흔한 해변가 밤풍경일뿐이었다. 감성이 방전된 탓이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