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의 기록
ⓒ chaelinjane
익숙하고도 낯선 형식
갑자기 웬 기록 시리즈? 라며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두리의 모험〉에 웰링턴 출장 에피소드를 써냈기 때문! 사실 "○월 ○일의 기록"이라는 형식은 몇 년 전 한참 n사 블로그를 운영했을 때 제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년 ○월 ○일 ○요일 오전/오후 ○○시 ○○분의 기록"이었다. 글을 발행하기 바로 직전 시간의 분 단위까지, 마치 '좌표'처럼 기록해 거의 매일의 일상을 써내려갔었다. 문득 이렇게 적고 있으니 이십대 초반의 내가 떠오르며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온전하게 책임지는 자유와 절제, 그 사이의 어둠 상자에서 나만의 이미지를 현상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때였다. 나는 여전히 기록 중독자로 살고 있지만 삶의 공간도, 일상도 참 많이 달라져 있다. 그때는 이렇게 감히 모험을 선택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때보다 지금 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주비행사의 심정으로 기록을 써내려가는 것 같다. 자유와 절제의 스펙트럼이 나무의 나이테 지름처럼 넓어지고 있다. 새로운 시간에,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플랫폼으로, 다시 이렇게 시간의 좌표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찾아온 것은 변화가 많은 시기의 반증이기도 하다. 일상성을 형성해 삶의 축으로 중심을 잡고 싶은 것이다.
670km
일요일 밤 11시가 다 되어 출발했다. 회사 근처의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 대장정의 길을 나섰다. 운전대를 책임져야 하는 두두와 부장님은 에너지 드링크를, 피로누적으로 입이 헐거나 몸에 이상징후가 생기기 싫은 나는 비타민 워터를 챙겨 들었다. (사실 비타민 워터는 내가 저번 웰링턴 출장 때부터 고집스레 챙겨 먹는 음료수였다. 한계에 다다르는 작업에는 비타민 보충이 필수적일 것 같아서!─건강을 챙기는 건 늘 성공적인 선택이다.) 유난히도 밤 조명이 에펠탑 같이 보였던 오클랜드 시티의 스카이 타워를 지나 남쪽의 수도로 향하는 1번 국도에 올랐다. 첫 운전의 목적지는 해밀턴에 있는 맥도날드. 지난 주말에 갔던 라글란 바로 옆 도시까지 이동할 계획이었다. 뉴질랜드는 새벽에 도로 공사를 하는 경우가 많아 변수가 많은데, 이번에도 중간에 모토 웨이가 봉쇄되어 있어서 신호등이 많은 마을길로 조금 돌아가야 했다.
새벽 1시쯤 해밀턴 맥도날드에 도착해 (아주) 늦은 저녁을 먹었다. 점심 때 회사 근처 한인 식당에서 사온 순대국이 밤 열시까지도 소화가 덜 되어서 딱 배가 고파질 즈음이었다. 빅맥 세트와 치킨 너겟, 그리고 스프라이트 한 모금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출발했다.
659-807 State Highway 1, New Zealand
ⓒ chaelinjane in July, 2018
1번 국도는 세계에서 두번 째로 크다는 타우포 호수의 가장자리에 살짝 맞닿으며 뻗어 있다. 잠에 취약한 두두는 버거를 먹고 난 후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 나도 미친듯이 피곤했으나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와이타하누이 근처에 공원 쉼터가 나와서 잠깐 쉬었다 갔는데 정말 몇 걸음 앞에 호수가 있었다. 바람이 만들어낸 파도가 차 옆까지 밀어오고 있었는데 밤바람에 잠이 확 달아날 지경이었다.
길을 막는 짐차들이 중간중간 지뢰처럼 존재하는 것도 새벽 운전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게다가 뉴질랜드의 차로는 1차선이 유지되다가 passing way가 짧게 나오고 다시 긴 1차선의 연속이기 때문에 타이밍이 안 맞으면 위험을 감수하고 중앙선을 넘어가거나 (그래서 중앙선이 흰 점선으로 된 곳이 많다. '흰 점선'이라니… 처음에 운전할 때 나는 일방통행 차선이 두 개인 줄 알았다.) 인내심을 충분히 발휘해야 한다. 지루한 장거리 운전에서 속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짐차를 만나면 순식간에 졸음의 늪으로 빠지기 쉽다. 비행기에서 봤던 험준한 루아페후 산길을 오르며 앞에 있는 짐차의 빨갛고 하얀 안전 표시를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체면에 걸린듯 잠이 쏟아졌다. 세 사람 다 영혼이 안드로메다로 향할 무렵, 더 위험해지기 전에 한숨 자고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휴게소가 나올 때까지 안간힘을 쓰고 버티다가 헌터빌의 한 공원에서 이 모든 불편함도 잊고서 잠의 터널로 진입했다.
눈을 떴을 때 동이 터 있으면 마치 오래 잔 것과 같은 개운함을 맛 볼 수 있다.
부장님이 알려주신 팁이었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정말 효과가 좋았다! 비록 몸을 속이는 일이었지만, 체감 피로도가 부쩍 감소해 있었다. 절대, 절대, 동 트는 하늘을 보지 말 것! 길고 지루한 일을 할 때 시간의 흐름을 목격하면 급격히 피곤해진다는 지론이었다. 이걸 숱하게 밤샐 일이 많았던 대학생 때 알았다면!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상쾌한 음악으로 정신을 마저 깨우고 나니 거짓말처럼 꽤 오래 숙면을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은 불스(Bulls)라는 지역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챙겨 먹었다. 지긋지긋한 맛. 단 두 끼만에 질리고 말았다. 일 하는 동안 절대 버거는 먹지 말자고 셋이서 입을 모아 말했다. 오전 10시, 고군분투 끝에 드디어 현장에 도착했다.
뜻밖의 인증
일주일 일하다 그만 둔 직원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폭탄급으로 일을 망쳐 놓고 가서 본의 아니게 제일 처음 내가 작업한 부분들이 돋보이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난이도가 있는 섬세한 작업이 주어졌다. 웰링턴 현장에서는 잘못된 부분을 샌딩기로 갈아낸 후 다른 부분과 갈아낸 정도가 비슷하게 전체적으로 다시 샌딩하고 CFP 언더코팅 & 탑코팅을 더 해야하는 추가 작업과, 칠을 위한 마스킹 테이프 작업, 한쪽 벽면 페인트칠→페인트 필러→샌딩→언더코팅 & 탑코팅 작업, 블랙 실링 언더코팅 1회 & 탑코팅 2회 작업 정도를 하면 될 것 같다. 수요일까지, 이틀 안에 끝내는 게 목표. 그 이후로는 포리루아 현장 작업을 도울 예정이다. 오늘 작업할 두 곳을 둘러 보고나는 오후 5시쯤 먼저 퇴근했다. 벌써 28시간이 작업 시간으로 기록되었다. 돈을 번다는 건 참으로 어려우면서도 순식간이다.
당분간은, 마지막 여유
ⓒ chaelinjane in Porirua, New Zealand
전기담요가 깔린 호텔이라 뜨뜻하게 몸을 지지면서 3시간 정도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저녁으로 라면과 빵, 그리고 코코넛 워터를 챙겨 먹고서 호텔방에 있는 코코아 분말 & 커피 분말을 섞은 값싼 모카 커피를 타 마셨다. 무제한 와이파이가 아니라 셋이서 일주일동안 10GB를 나눠 써야 하기 때문에 음악은 TV에 있는 음악 전문 채널을 틀어 놓았다. 곧 새벽 한 시. 두두와 부장님이 곧 돌아올 시간이다. 여러 모로 고단한 일주일이 되겠지만 할 일은 제대로 하고, 노력의 댓가도 마음껏 누려 보자. Sure 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