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스럽다. 작년 박근혜 탄핵 재판과정에서 김평우 변호사가 깽판을 놓고 재판관의 명예를 훼손시킨데 대한 강원일 주심 재판관의 심경 표현이다. 유감스럽다. 정의를 상실한 자들이 법의 합리성과 형평성을 들먹이며 저잣거리의 비아냥거림을 뱉어낼 때, 공격받은 재판관은 단지 유감스럽다고 할 뿐이다. 그는 간결한 언어로 품격을 지키며, 적들의 장황한 궤변과 천박함에 놀아나지 않았다. 법의 정신은 법조인의 품격으로 지켜진다. 법 조항은 그 정신의 상술(詳述)에 지나지 않는다. 품격을 잃은 법정은 고귀한 법의 정신을 상실하고, 시장의 논리에 흔들린다.
유감스럽다.
이는,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마지막 울버린 스핀오프 시리즈의 매거폰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심경이기도 하다. X-Man시리즈 중 제임스 맨골드가 만든 "더 울버린(2013)"은 불멸의 망작이지 않던가. 울버린을 일본에 데려가 사무라이와 겨루게 하다니... 가장 애착을 가진 시리즈를 어찌 이리 훼손시킬 수 있는지... 스크린 위로 어지러운 피의 난장에 마음이 참담했다.
평론가와 X-MAN 골수 팬들에게 뭇매를 맞았지만, 어려움없이 영화를 대하는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런 동서양을 버무린 설정을 제법 좋아하는 것 같았고, 흥행에는 성공했다. 아마도 그가 다시 매거폰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이전 영화의 흥행 때문일 것이다.
울버린 시리즈의 마지막이란 정보만 듣고, 첫 개봉일 심야에 영화 "로건"을 보러갔다. 오직 울버린과 휴잭맨에 대한 의리로..."내 히어로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감독 놈에게 침을 뱉으리라." 영화관을 향하는 내 심경은 다만 유감스럽지 못했다.
영화의 설정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2027년, 뮤턴트가 멸종된 시대, 리무진 렌트 운전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 병든 울버린과 뇌질환을 앓으며 뒷방 늙은이가 되어버린 프로페서 X의 모습. 영화 초반, 가혹한 세계에 던져진, 이 남겨진 자들의 초라함과 분노어린 허망함이 관객의 정서를 장악했다.
울버린의 고장난 육체는 그의 불멸성과 극명히 대비되었다. 고장난 갈퀴를 직접 손으로 뽑아내고, 아만다티움의 독성으로 병든 몸은 치유력을 상실했다. 그는 늙고, 피폐하고, 밥벌이에 찌들었다. 폐기된 대형 안테나에 숨어사는 찰스 자비에의 모습은, 첨단의 세리브로에 앉아 세계 정신을 장악하던 전성기와 대비되며, 영웅의 몰락을 극대화 시킨다. 용기를 잃은 병사와 미쳐가는 현자의 모습은 과거와 너무나 생생하게 대비되어 이제 우리를 잊어달라고 말하는 듯 했다.
영화는 기존 정서를 붕괴하는 과격한 설정을 어떤 호들갑도 떨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간다. 이러한 담담함이 오히려 영화의 극단적 설정과 대비되며 관객을 압박했다. 번외적 플롯으로 보이던 찰스 자비에의 발작은 영화를 지배하는 절망적 정서의 척추다. 이 발작의 실체 앞에 관객은 그들이 대면하는 모든 절망을 긍정한다. 이들이 맞이하는 초라한 죽음은, 혹여나 견뎌내야 했던 삶의 무게보다 가볍지 않던가.
감독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주인공들을 가혹한 세계로 몰아넣으면서도, 등 뒤로 숨긴 왼손에는 생의 마지막 선물을 들고있다. 결국 그들의 숱한 투쟁의 목적과 결말은 무엇이었나? 돌연변이와 인간, 인종을 넘어 서로 친구가 되는 세상. 서로를 걱정해주는 마음과 돌보는 희생이 있는 세계. 탄생을 축하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세상. 피폐해진 세계에서도 서로 떡을 때며 아름다운 저녁식사를 하고, 나의 희생과 소멸을 딛고 살아갈 새로운 세대있는, 나의 가족과 친구, 딸이 있는 세계.
16년 여 시간을 영화 속에서 화려한 돌연변이로 살았던 나의 영웅들은 이제 인간의 세계에 기거하며, 인간의 초라한 죽음을 맞았다. 참회하는 불완전한 현자으로써, 불멸을 포기한 한 아이의 아버지로써. 시대의 이념과 정의, 영웅의 대변인이 아닌 온전한 자기자신으로, 철저히 한 인간으로 죽었다. 때문에, 영화의 제목은 마땅히 "로건"이어야 했다. 죽음 앞에 울버린은 허상에 불과하다.
영화 "로건"은 제임스 맨골드의 참회다.
서기 2000년, 밀레니엄 해에 X-Man 시리즈의 서막을 열었던 영화 "X-Man"에서 로건과 찰스는 만났다. 서로가 너무나 달랐지만, 이 만남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지금 X-Man을 상징하는 두 뮤턴트는 어떠한 이념도 교훈도 밀어둔 채, 인간으로서 소박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로건과 찰스는 화려하고 장황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각자 개별적이고 초라한 마침표를 찍으며 이야기를 완성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이루었다. Marvel이 어떤 기획을 가지고 있건, 내게 있어 X-man 시리즈는 끝난 것이다. 찰스 자비에의 무덤처럼, 반짝이는 호숫가에 자리한 로건을 작은 묘지를 보며 생각했다.
안녕, 로건...
안녕, X-Man...
그동안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