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다시 볼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담 플로르님의 글의 모티브가 된 "쉐임"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대한 불같은 애정이 다시 솟구쳐 오름을 느꼈다. 그리고 오롯이 나로 돌아가 집중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 그 밤은 나 혼자였다.
"섹스 중독의 외롭고 불안한 남자, 그 남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의 디테일을 따라 잡았다. 저렇게 섹시한 남자가 위험한 뉴욕 지하철을 타는것이 걱정되어 한구석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피아노 건반 위를 달리는 남자의 발밑에서 탭댄스를 추고 싶었다. 매일 같이 28 street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싶었다. 죽음과 같이 찾아오는 사정에 같이 오열해주고 싶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의 그림자에 기대어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I want your love."
주인공 마이클 패스벤더에 넋을 잃어 급기야는 "제인에어"까지 보고 말았다. 그는 숨이 멎도록 섹시했다.
최근 몇년간 영화를 보는 것이 나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씬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할 뿐더러 도무지 재미라곤 눈꼽만큼도 느낄수 없는 황당한 상황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머리속에는 오만것들이 떠올라 영화에 조금도 집중할 수 없었다. 너무 터무니 없어 설명할 길이 없는 짜증이었다. 나름 영화를 봤다면 꽤나 본 편이었고 영화 관련 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갖가지 폼을 잡던 시절도 꽤 길었었다. 평생 영화를 사랑하며 살아갈줄 알았는데 삶은 내 생각처럼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무엇이 나를 나의 영화들과 멀어지게 했을까.
그러고보니 나에게 (한동안 자칭) 난독증이라는 증세도 있었다. 그것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죽을 맛이었다. 손에 책을 들고는 있지만, 눈은 글자를 향해 있지만, 해독이 안되는 암호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았다. 나의 의지와 상반된 참으로 희한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문장을 읽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잊고 딴 생각에 빠져 들다가 깜짝 놀라 다시 책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번을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다가 결국에는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이것을 몇개월전에 극복할 수 있었다. 바로 천명관의 "고래"라는 소설을 통해서였다. 나의 호흡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 그리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밀려드는 해방감에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나의 난독증은 말끔히 해소되었다.
책도 영화도 못 보던 그때는 죽을 만큼 답답한 감옥에 갇힌듯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두가지 어려움의 시기는 동시에 나를 찾아왔다. 결혼과 함께였다. 출산과 육아라는 가족의 의무에 묶임과 동시에 나만의 것들을 누릴수 없게 되었던 것 같다. 가족이라는 굴레가 나의 자유로운 의지와 영혼을 가두어 버린 것일까.
나는 오랜 세월 그랬던 것처럼 평생을 혼자 살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의지와 무관하게 "살아지는 세월"도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세월 동안은 나를 위한 나만의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했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신이 주는 공평함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내것을 포기하고 대신 남의 것을 내것인양 누리는 호사를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충실한 현재의 내 삶속에서 또 한편으로는 버려야 할것들을 차분히 알려주고 싶은 신의 지혜일수도 있겠다. 모든 걸 다 가질수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그러다가 삶의 굴레를 비켜갈수 있는 어떤 날이 오면 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된다는 것이다. 나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은 감미로운 바람이 되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내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만의 시간이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저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두눈 부릅뜨고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내가 소설속의 영화속의 주인공이 되어 사랑을 하고 아파하고 싸우며 성장해 가는 것이다.
이밤 나는 다시 혼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