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통일에 그닥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남들처럼 먹고 살기가 바빴다. 그런데 불과 몇년 전에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원래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받을거 다 받고 누릴거 다 누렸는데 내가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수 있을까, 내가 이 사회에 무엇을 환원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서 말이다. 그때 든 생각이 통일학교였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 통일학교를 만들고 싶다. 사실 말이 학교이지 작은 공부방 같은 거다. 한글과 역사 공부를 겸한 작은 공부방이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출입해 책을 읽고 토론을 할수 있는 그런 공간이면 충분하다.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아이들의 경우는 대개 한국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도 관심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것이 학교(국제학교)에서 배우는 영국역사를 비롯한 유럽역사에 치중할 수 밖에 없고 그들의 역사에 더 쉽게 접근한다. 그네들이 역사를 배우는 방식은 우리하고 사뭇 다르다. 아니, 완전 다르다고 표현하는게 맞겠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나 우리 때에 역사 공부란 연대기 외우는 공부였다. 연도별로 시대별로 외워야 할것들이 엄청 많았다. 국정교과서 논란이 일던 시기에 교과서 내부를 일부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는데 특별히 교과방식이 달라진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내 기억으로는 국사든 세계사든 열심히 연도를 파서 시대별로 정렬할 수 있을 정도의 암기력이면 역사 공부를 잘하고 있다고 칭찬받았던 것 같다. 역사 시간에 역사관이나 학습자의 판단과 비판은 자리 잡을 공간이 없었다. 나는 역사 시험에 대부분 우수한 점수를 받았지만 학교를 졸업한 후 머리속에 남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역사관이라는게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하지만 나의 아이들이 배우는 역사 교육은 방식이 매우 다르다. 중학생이 된지 얼마 안된 큰 아이가 어느날 역사 시험이 있고 주제는 르네상스라고 했다. 어렵다고 했다. 일루 갖고와봐 엄마가 알려줄게. 호기롭게 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아이가 들고 온 역사 교과서는 정말이지 놀라웠다. 난 원래 애들이 뭘 공부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웬만한 월간 패션잡지만한 크기의 책에 온통 르네상스에 관한 내용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우리도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해 배웠던 것 같은데 양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천배쯤 될것 같다. 다음날 보는 시험은 게다가 몇몇 작가들을 비교하는 에세이를 써야 한다고 했다. 도움을 전혀 줄수 없어서 아이방에서 도망치듯 나올수 밖에 없었다.
아이는 그렇게 많은 정보를 취합하고 정리해 가면서(미켈란젤로에 대한 내용만으로도 10페이지 이상이다) 제 나름의 역사관을 세우는 과정을 가질것이다. 에세이에서 요구하는게 스스로 의문과 가설을 세우고 논리적 근거를 통한 결론을 도출해 나가는 과정이 아니던가. 역사적 배경과 흐름을 읽고 주변 정세를 해석하며, 다양한 사례를 비교분석하고, 근현대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고 재조명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가지는 의의를 스스로 정립하게 해준다. 한 학기에 한 두가지만 치중해서 공부한다. 아, 그리고 에세이 쓰는 방법은 따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알아서 쓰게 한다.
이런 교육 환경속에서 자라는 이곳의 아이들에게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한국의 역사를 접근하고 궁극적으로 통일의 당위성을 설명할지 감을 잡기가 어렵긴 했다. 특히나 나는 역사 공부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가르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다. 내가 할수 있는건 자료 만드는 일, 광고홍보하는 일, 그리고 찾아온 아이들에게 찌파게티를 끓여주는 일 정도가 될것 같다.
난관에 부딪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능력 안에서는 할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따로 교사를 구하거나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필요했다. 한국에 있는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가관이었다.
"하지마. 국정원에서 너 잡으러 갈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리. 하긴 개인사찰이니 블랙리스트니 종북으로 몰아가는 판국에 내가 무엇을 할수 있단 말인가. 그 선배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자랑스럽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뒤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북한 식당에도 가지 않았다.
그뒤로 몇년이 그렇게 흘렀다. 한글방, 역사방, 통일방을 잊어버린 채.
스팀잇을 만나고 나서 다시 나의 꿈에 대해 그것도 실현가능성을 제고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대도 바뀌고 정권도 바뀐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커리큘럼의 확보때문이다. 이곳엔 역사를 주제로 포스팅한 분들이 많이 계시다. 근래 들어서 대거 더 진입하신것 같다. 근현대사를 쓰시는 분, 인문학과 미학을 쓰시는 분, 기억해야할 주요사건을 깔끔하게 재조명해주시는 분 등 나혼자 읽기에는 너무나 아까워 우리아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물론 일일이 찾아가 교육 자료로 사용할수 있게끔 허락을 구해야 하겠지만 현재 나로서는 반은 성공한 셈이다.내가 너무 앞서가는 경향이 있다.
우선은 작은 아파트를 구해야 한다. 오피스빌딩보다는 아이들이 출입하기 편한 아파트가 좋겠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아우르려면 방이 세개쯤 있으면 좋겠다. 우리집에 쓸데 없이 먼지만 쌓여가는 책들로 우선 시작은 할수 있으나 곧 콘테이너 단위로 중고 역사서적을 대량 구입해 와야 한다. 회의용 큰 테이블도 사야하고 토론에 필요한 여러가지 커리큘럼도 1년치 정도는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한다. 학부모들을 상대로 광고도 하고, 우리 역사방의 의의에 대해 설득을 시키는 과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는 문제는 운영비이다. 이 문제는 두고두고 해결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이들이 찾아오면 적어도 짜파게티 정도는 끓여 줄수 있어야 하고 가능하면 전문 역사 선생님을 초빙하여 월급도 드리고 싶다. 때때로 강사 초빙도 하고 싶고, 박물관 견학이나 유적지 방문도 함께 하고 싶다. 이것 또한 믿는 구석은 있다. 이쯤에서 이렇게 외치면서 마무리를 해야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 소리는 나의 몽상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