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JOHN입니다.
세계경제위기(Crisis)의 재현과 암호화폐 (1)에서는 과다부채가 왜 위험한지에 관한 일반론을 설명했고, 세계경제위기(Crisis)의 재현과 암호화폐 (2)에서는 현재 세계경제의 하방리스크로 지목되는 중국에 대해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 두 포스팅에서는 현재 상황을 분석한다는 의미에서 데이터와 이론에 기반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위기 이후의 상황에서 암호화폐를 둘러싸고 사회경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상황 등에 대한 제 생각을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3. 부채와 경제위기 그리고 암호화폐
1) 부채누증과 경제위기
경제성장의 장기추세는 기술진보와 효율성이라는 '생산성'이 결정한다. 즉, 제한된 자원 하에서 더 많은 재화를 만들게 하는 '기술'과 제한된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최적으로 배분하는 '효율'이 성장을 결정하는 것이다. 적절한 금융은 이러한 성장을 촉진하기도 하지만, 실물경제와 무관한 신용확장은 자원을 낭비케하고 모두를 더 가난하게 만든다.
역사적으로 주요한 경제위기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여지없이 신용이 크게 팽창했다. 여기서 '크게'라는 말은 실물경제를 지탱하는 것 이상으로 금융불균형이 심화됐다는 말이다. 그리고 1990년 일본의 경제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그랬고, 아시아 외환위기의 진앙지였던 태국이 그랬으며, 글로벌 금융위기와 재정위기가 발생한 미국과 유럽에서도 그랬다. 이 역사들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은 낮은 금리, 풍부한 유동성의 혜택을 볼 수 있는 호시절에 지속적으로 위험성을 키워왔다는 것이다. 신용은 부풀었고, 큰 레버리지로 자산들을 매입함으로써 자산가격이 크게 올랐다. 높아진 자산가격은 경제주체들의 신뢰를 제고시켜 더 큰 신용을 만들어 냈으며, 그 호황이 지속되리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 영원할 것 같던 호황은 경제에 어떤 충격이 가해지기만 하면 아무도 모르게 파멸적인 공포로 뒤바뀌어버린다.
애초에 무엇이 문제였을까? 주류경제학자들은 실물 사이클과 무관하게 비대해진 금융 사이클을 지적하며 이것을 초래한 규제완화, 경제주체들의 비합리성, 정책당국의 실책 등을 탓하기도 한다. 반면 오스트리아 학파는 현재의 화폐시스템 자체(국가의 화폐독점, 그리고 부분지급준비제도 등)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현재 화폐시스템 하에서 돈은 실물적 가치가 없는 빚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부채누증을 오히려 조장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신용이 순환주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화폐가 금으로부터 분리된 1971년 이후로 신용이 지속적으로 팽창해왔다는 점들을 감안해보면, 관점의 기준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두 학파의 주장이 모두 타당해보인다. 그리고 두 학파 모두 과도한 금융 또는 신용이 파괴적인 부작용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한다.
대부분의 신용팽창은 인위적으로 화폐가 증발되고 이자율이 낮아진 호경기에서 시작한다. 이런 호경기에는 노동력과 원자재 수요가 증가하고, 임금과 원자재 가격이 올라간다. 임금 상승으로 제품을 더 많이 구입하게 되면서 기업들은 투자를 늘리고, 생산량을 늘린다. 호황기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서 대출수요가 더 늘어나고, 기업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투자를 늘리며 물가, 부동산 및 주식 등의 자산가격이 모두 상승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늘어난 신용이 과도하다는 것이 경제 곳곳에서 감지되기 시작한다. 대출수요가 늘어나면 대출이자는 오를 수밖에 없고, 이미 과다한 부채가 쌓인 결과 부실대출들이 나타난다. 인위적인 저금리로 인해 수익성이 충분했던 투자는 설비가 과잉되고, 이자율도 상승하면서 수익성이 사라져간다. 점차 규제당국도 대출을 줄이고 경기를 냉각시키기 위해 유동성을 축소하려고 한다. 경제가 긴축국면에 들어서면 더 이상 수익성을 낼 수 없는 부실기업들과 원리금 상환에 허덕이는 가계가 나타난다. 부실대출이 증가하면 점차 은행들도 청구권의 일부를 포기하면서 손실을 기록할 수밖에 없다.
위 사실들을 세계에서 가장 긴 신용팽창이 진행 중인 중국 데이터를 통해 설명해보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용팽창이 본격화된 중국은 높은 성장을 구가했다. 2006~15년 간 아시아 신흥국보다 임금 상승률이 2배 이상 높았고, 기업의 고정투자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기업대출 및 가계대출이 크게 늘어났으며, 중국의 자산가격도 크게 급등했다.
과잉신용으로 나타난 과잉설비의 결과로 투자효율성도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아래 좌측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추가적인 생산을 위해 요구되는 고정투자분, 즉 ICOR가 크게 악화됐다. GDP를 한 단위 늘리기 위해서 2007년에는 2의 고정투자가 필요했다면, 이제 6.7의 고정투자가 필요해진 것이다. 거기다 부채가 점차 팽창하자 가계와 기업은 원리금 지급에 부담을 느끼고 있고, 은행의 부실여신(NPL)이 증가하고 있다. 문제들이 심화되자 당국은 금융규제를 강화하고, 급히 레버리지를 축소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중국은 높은 신용 성장덕분에 고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부채를 청산하기 시작하면 심각한 성장둔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인위적인 신용확대로 나타나는 부작용은 자원배분의 왜곡과 경제의 취약성 증대다. 부채가 더 많이 팽창하고, 당국의 조정 타이밍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고통은 더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금리상승, 경기침체, 인구구조 변화 등 그 유발기제가 무엇이건 인위적인 경기호황 후에 반드시 불황은 나타난다. 그때 생각보다 충격이 커서 채무가 많은 기업과 가계가 부실화되고 파산하면 노동자는 실직하고,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임금도 하락한다. 자산가격과 통화가치도 크게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연쇄적인 사건의 결과로 물가가 하락하면서 충격은 더 커진다. 디플레이션이 진행되는 사회에서는 소비와 투자가 감소하고, 실질금리는 상승하므로 채무자의 빚 부담은 누증된다. 이것이 이른바 부채 디플레이션이다. 90년대 이후 일본이 그랬듯이 경제가 죽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와 발권력이 있는 중앙은행은 이런 위기 및 디플레이션을 방치하려 하지 않는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무엇을 할 것인지, 우리는 역사적인 경험으로부터 이미 알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의 한국경제와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라. 무엇이 생각나는가? "금리인하, 양적완화, 구제금융, 그리고 우리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중앙은행은 금리를 내려 더 많은 돈을 찍으면서 물가를 올리려하고, 정부는 파산한 기업을 구제하려 애쓴다. 위기에 처한 부실기업들이 구제되면서 정부의 빚이 늘어나고, 발행된 통화량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진다. 이런 노력들로 인해 위기가 진정되고 경기가 다시 회복국면에 접어들었다 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통화량은 반드시 물가에 상승압력을 가하게 된다. 그러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리고 풀린 통화량을 흡수하려 한다.
문제는 '여전히 부채가 많은 사회'에서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시행하는 것이 정말로 안정적인지 입증된 바가 없다는 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지금 견고한 회복세를 보인다는 미국도 출구전략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는 논쟁이 많다. 최근 미국 경제는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면서 통화정책 정상화 속도가 빨라질 것이란 시장의 예상이 거세지고 있다. 이런 긴축기조의 강화는 여전히 부채수준이 높은 가계와 기업의 부담을 늘리면서 다시 실물경제가 침체국면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또는 비대해진 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를 축소할 때 금융시장의 큰 긴축발작(tantrum)을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 라가르드의 경고처럼 또 한 번의 금융위기를 치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긴축과정에서 큰 충격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플레이션의 상승은 피할 수 없다. 인플레이션이 크고 지속적일 것이란 민간의 기대가 강건해진다면, 자기실현적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은 더 커지는데 이때 화폐의 구매력은 하락하고 신뢰도도 저하될 수 있다. 똑같은 양의 화폐를 갖고도 우리는 점점 가난해지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부의 재분배와 관련되는데, 위기상황에서 경제의 구매력과 자산이 이동하고 그 결과 사회의 수입구조와 자산구조가 변화한다. 대부분의 위기를 겪은 경제들은 중산층이 분화되고, 양극화 문제가 심화된다. 보통 위기과정에 찍어낸 돈들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낮은 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은 기업의 이윤을 높이고, 자산가격을 높인다. 경제성장이 미약하고 실업률은 여전히 높은데도, 기업이 높은 이윤을 기록하며 주가는 사상최고점을 찍었다는 뉴스가 이상하게 느껴진 적은 없는가? 위기의 중앙에서 99%의 대중은 여전히 고통을 겪지만, 1%의 소수에겐 이 위기가 기회가 된다. 싼 가격에 자산을 매입하고, 기업을 인수하며 오히려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2) 경제위기, 그리고 암호화폐
위기의 폭풍우가 지나가고 남는 것은 화폐의 구매력 하락, 경제의 불안정성 심화 그리고 사회의 양극화다. 오스트리아 학파가 현대의 화폐시스템이 악의 근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화폐를 독점하는 국가, 그리고 신용팽창을 허용하는 은행시스템으로부터 위기가 발생하지만, 극복하는 과정에서 너무 큰 왜곡이 생긴다. 대마불사(too big to fail)라는 이름으로 소수는 무사히 구제받고, 절대 다수가 원치 않은 고통을 분담한다. 그리고 위기를 겪으면서 국가기관은 알게 모르게 규모가 더 커지고, 반사회적인 재분배가 나타나며 빈곤한 사람들은 늘어난다.
혹시 이것이 부당하다고 느끼며, 분노를 느끼는가? 당신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Hayek는 국가의 화폐독점권 때문에 경제가 불안정해진다고 했고, 많은 사람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Occupy Wall Street 시위로 분노감을 표출했다. Occupy Wall 시위의 본질은, 정작 위기를 초래한 1%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지만 99%는 고통을 분담하게 만드는 이 잘못된 경제시스템을 재설계하라는 정언명령이다. 또는 경제의 주도권을 대중에게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무정부주의적 시위다. 그리고 현재의 금융시스템이 잘못됐다는 냉철한 인식과 Occupy Wall Street의 분노의 씨앗으로부터 비트코인이 태어났다. Occupy Wall 운동이 암호화폐의 경제사회적 기원인 것이다.
"기억하십시오.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닙니다. 문제는 체제 자체입니다. 그것이 당신들을 부패하게 강제합니다. 적들에 대해서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을 희석시키기 위해 이미 행동에 들어간 잘못된 친구들에 대해서도 깨닫기 바랍니다.
( … )
한가지 위험은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진 마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축제는 쉽게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 생활로 돌아가야만 하는 그 다음날입니다. 그러면 그때에도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의 나날들을, 말하자면, "아! 우리는 젊었지, 그리고 그땐 참 아름다웠지"라고 기억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기본적 메시지가 "우리가 대안에 대해 생각하는 게 가능해졌다"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Slavoj Zizek, "We Are The Awakening"(황정규譯)
- 사실 그 후로 크게 변한 것은 별로 없다. 대다수의 대중들은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지 못했기에, 탐욕스러운 금융시스템을 재설계하자는 그 구호는 유행으로 끝났다. 힘든 시기가 지나가니 새로운 돈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금융위기를 거치며 강화됐던 규제는 경제가 회복되자 다시 완화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돌고 도는 쳇바퀴다. 이 화폐시스템 하에서는 5년 또는 10년 후 똑같은 곤경에 빠져도 대중들은 '다시 경제를 살리고, 우리의 화폐를 지키라'면서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고 희구할 것이며,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우리는 더 가난해진다. 현재의 화폐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대중들이 여전히 그것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1년 달러가 금과의 연계에서 분리된 이후 대부분의 법정통화는 철저히 정부의 신뢰에 의존하고 있고, 대중들은 정부가 화폐를 지켜줄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런데 화폐가 불태환된 이후로 부채가 크게 늘어나고, 금융위기의 발생빈도가 급격히 잦아졌다는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전통적 화폐의 근본적인 문제는 작동하기 위해 신뢰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중앙은행은 화폐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신뢰를 받아야 하나, 화폐의 역사는 그 신뢰를 배반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은행은 우리의 돈을 보유하고 보내는 데 있어 신뢰를 받아야 하지만, 준비금도 거의 없이 신용버블을 배경으로 엄청난 대출을 했다" - Satoshi Nakamoto
지금의 화폐들이 얼마나 더 유지될 수 있을까? 과다부채로 불안정한 경제, 적자정책, 그리고 양적완화로 엄청나게 불어난 유동성 등은 달러를 비롯한 화폐들의 구매력을 크게 저하시켰다. 특히 기축통화인 달러에서 문제가 심하다. 아직은 달러화가 국제통화시스템의 중심이지만 미국의 달러패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분석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시스템의 복원력을 믿는 사람들은 미국경제가 회복하면서 달러의 가치도 회복될 것이라 주장하지만, 달러의 가장 주요한 적은 어쩌면 미국 자체일지도 모른다.
달러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것은 미국경제에 의한 내부요인(공급증대) 외에 외부요인(수요감소)도 있다. '달러의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 신흥국들은 보유고에서 달러비중을 줄이고, 非달러 통화와 금을 사들이고 있다. IMF 통계에 따르면 2016년 신흥국 전체의 공식적인 금 보유는 금융위기 이전에 비해 84%나 늘어났고, 같은 기간 중국에서 3.1배, 러시아에서 3.6배나 늘어났다. 불태환 이후 미국이 지금까지 달러의 가치를 유지했던 중요한 수단은 군사력과 석유였다. 그러나 중국이 세계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위안화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고, 석유거래를 위안화로 가능케할 수 있는 수단(페트로위안)을 늘리고 있다. 석유결제를 비롯해 달러의 국제적 사용이 위축될수록, 달러가치의 하락은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미국은 이를 어떻게든 막으려 하겠지만 그 패권의 유지가 항구적일 것 같지는 않다.
최근 1년간 금선물(Orange)과 달러인덱스(Blue) 가치변화 (Bloomberg)
달러의 유동성이 이토록 많은 상황에서 달러수요가 감소하기 시작하면 높은 인플레이션은 불가피하다. 인플레이션의 가중은 달러 보유자의 구매력을 더 약화시키고, 미 연준의 긴축정책을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조정은 경제를 다시 균형으로 가져간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일이지만, 누차 말했듯이 과다부채 경제에서 금리를 빠르게 올리는 것은 결코 안정적인 작업이 아니다. 현재의 미국경제가 경기순환의 후기국면(late cycle)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가운데, 혹시라도 미국경기의 성장세가 다시 꺾이게 되면 달러의 신뢰는 반드시 약화일로를 겪을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딜레마이며, 최근 국제통화시스템의 재편이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이유기도 하다. 달러 헤게모니가 약화되면, 달러보유로 쌓아왔던 세계경제의 부와 자산도 상당한 정도로 위축될 것이다.
CASE 1: 달러의 신뢰성에 큰 문제가 제기되면, 그 반사이익을 누리는 것은 무엇일까? 상당한 자금은 금으로 갈 것이다. 유로 및 위안화도 가치상승을 기대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경제가 미국보다 훨씬 건전하거나, 안정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유로나 위안화가 달러를 넘는 기축통화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금융계 일각에서는 미국의 달러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 결국 금본위제로 회귀하거나, SDR 및 금에 연계한 새로운 통화를 기축통화로 쓸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무엇이 되었든 한 나라의 힘이 지배적인 화폐를 배제하고, 세계경제 자체에 더 도움이 되며 정직한 화폐를 만들자는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사실 세계적인 통화를 만드는 것은 국제정치의 영역이라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CASE 2: 달러의 신뢰성 문제가 불거지면, 다른 외국통화들이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존 금융시스템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제기될 수도 있다. 중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의 구조적 문제가 위기로 터져나오면 사태는 더 심해질 수 있다. 비트코인의 기원이 기존 금융시스템에 대한 분노에 기인했듯이, 화폐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암호화폐가 재부상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째, 민간이 주도적으로 암호화폐를 발행하고 보유하는 것이다. 각 국가들은 화폐독점권 포기를 원치 않으므로, 상당한 정도의 제도화를 통해 암호화폐를 수용하고 규제한다. 현재 암호화폐 시장은 얼리어답터나 전기다수자(Early Majority)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국가의 제도화가 수용되고 나면 지금보다 양적으로 더 커질 게 분명하다. 이때 암호화폐는 현재의 Fiat Money와 공존하면서, 실물과 산업을 연계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금융자산 또는 무형자산으로 수용될 것이다.
CASE 3: 다른 가능성은 암호화폐의 성행을 민간보다는 '국가들'이 주도하는 것이다. 이미 세계경제의 블록화는 심화되고 있고, 암호화폐의 규제는 국가차원이 아니라 지역차원 또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규제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암호화폐의 블록화가 새로운 균형이 될 수도 있다. 이 구상은 러시아의 주도로 BRICS 국가들과 유라시아 경제연합(EEU)에서 실제로 논의되고 있다. BRICS 및 EEU 지역 내의 교역에서 달러를 사용하지 않고, 블록암호화폐를 사용함으로써 통화위험(currency risk)를 없애고 상호이익이 되는 경제협력을 이끌자는 것이다. 이때 BRICS 내의 신개발은행(NDB)의 지원을 받아 블록체인 개발이 활성화하고, 스마트 컨트랙트 설계를 통해 국제무역의 효율성을 크게 증진할 수 있다. BRICS Coin처럼 국가주도적 암호화폐의 발행은 블록체인 기술발전을 촉진하겠지만, 현존하는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의 잠재적 위협이 될 것이다.
아직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개인적으로 BRICS, ASEAN 등의 경제블록에서 저마다의 암호화폐를 쓰는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그때가 오면 현재의 종이화폐들은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들은 블록체인 상에 '혁신적인 비즈니스를 충분히 구축하지 못한다면', 결국 대다수가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다.
- 화폐의 역사에서 주도적인 화폐는 변화를 거듭했지만, 시대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통화만이 살아남았다. 한때는 그 신뢰를 돌덩이의 무거움이나 귀금속의 희소함에서 찾았고, 지금은 정부의 권위에 기대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화폐시스템은 스스로 그 신뢰를 저버림으로써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 생각해보면 인류는 기술을 개발하여 진보를 거듭해왔으나 화폐의 진화는 유난히 속도가 더뎠다. 어쩌면 지금 시대야말로 신뢰와 가치를 보장할 수 있는 기술이 생겼고, 어느 때보다 공정하고도 경제에 이로운 화폐를 창출할 시기가 아닐까. 아직은 이 실험이 진정으로 화폐의 역사를 바꿀 것인지, 혹은 그저 새로운 금융상품의 등장 정도로 끝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화폐는 사람들의 신뢰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당신이 암호화폐의 가능성을 믿고 또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확신시켜 줄 수 있다면 역사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을 것이다. 혁명이란 가치를 제시하는 소수로부터 불타오르지만, 대중들이 그 대안에 확신하고 동참할 때에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으므로. 역사가 우리와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