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혐오와 사람의 생소한 조합
10년전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참 특이하다. 그치? 어떻게 벌레도 아니고 사람 이름앞에 '혐오'를 붙여 영화로 만들수 있지?"제목만큼이나 요상한 포스터를 바라보며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의(그리고 지금까지도) 나에게 '혐오'란 그 무게가 너무 무겁고 날카로워 사람앞에 쉽게 쓸수 없는 단어가 아니었다.
주인공 마츠코는 윤락녀, 행려병자에 고독사로 삶을 마무리하지만 고통에 맞서 끝까지 사랑을 갈구한다.
미츠코를 형용한 '혐오'는 사랑에 대한 역설에 가깝다.
대혐오 - 극혐의 시대
영화가 개봉한지 10년이 조금 지난 지금. 우리는 서글프게도 누군가를 혐오하고,혐오 당하는 것이 일상인 세상을 산다.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옆의 여고생 두명이 "그 선배 극혐. 진지충에 개오글" 이라는 말을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쯤의 억양으로 내뱉고 있다.
나는 스피치 강사이니까 필연적으로 '설명충'. 학생은 '급식충' . 얼마전 '한남충'과 결혼해 아이를 낳은 내 친구는 '맘충' 대열에 들어섰으며 우리 엄마는 '틀딱충'이 되었다. 이쯤되면 사람사는 세상이 맞나 싶다.
그중 가장 거북했던 단어는 '틀딱'('틀니가 딱딱 거리는 소리를 희화함) 이다.단어 자체가 주는 해괴함도 충격이지만 노년층이 하는 모든 말은 '틀니가 딱딱거리는 소리'로 연상할게 될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아찔하다. 기존의 꼰대라는 말이 ('젊은 꼰대' 말이 있을 정도로) 나이보다 특정 태도에 관한 관점을 내포했다면 '틀딱'은 고연령에 대한 혐오 자체를 표현한다.
당신의 혐오를 '취존' 할수 없는 이유
물론, 내가 싫다는데 마음대로 말도 못하냐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노! '싫어하는것'과 '혐오'는 엄연히 다르다.
싫음은 서로에게 조율 가능한 영역안에 있다. 감정에 대한 공통 경험 때문이다. 대화나 상황적 요소에 따라 달라질수 있는 ‘여지’가 있다.
반면 혐오는 (단어 자체가 익숙해져 매번 체감하지 못할뿐)소름 끼치게, 토하도록 등의 보편적 영역을 넘어선 극단적 거부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고약한 단절을 낳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어마무시한 단어를 ' 취향’ 이라는 말로 적당히 포장해버린다.
“남들이 다 쓰니까 그냥 쓴다”는 변명과 함께.
적어도 '취향이니 존중하라'는 말을 방패 삼으려면 극혐에 대척하는 '극호'의 단어 또한 보편화 되어 었어야 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단어는 몇 없다.
흔히들 '취향'은 비정치적이며 판단이 유보될 수 있는 불가침 영역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왜 '모두까기 인형' 이 되었나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내가 아닌 모두에게 색안경을 끼고 '극혐'의 꼬리표를 붙이게 된걸까?
한국사회는 바쁘고 힘들다. 대부분은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기에도 버거운 삶을 산다. 그 속에서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큰 마음과 에너지를 써야하는 힘든일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혐오를 통한 냉소는 아주 손쉽다.
대상에 대해 무지해도 괜찮고 '생각하지 않음'을 정당화 할 수도 있다.
엄마들의 육아 고충도, 진지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누군가의 심정도, 태극기를 들고 대학로를 찾았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도 그저 '맘충/진지충/틀딱충'으로 규정 지으면 맘에서 말끔히 봉쇄 된다.
극혐충이 좀먹는 세상
거창하게 '언어는 사고를 지배 한다'던 촘스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언어와 사고가 상호관계에 있다는걸 잘 안다.
'사랑해' '예쁘다'의 긍정만을 말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워하는 감정도 개인의 정신 건강과 사회 다양성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다.
하지만 싫다, 밉다, 좋아하지 않는다의 범위를 너머 극혐으로 치닫는 표현은 끝내 우리 스스로를 좀먹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그냥 무시하면 된다고. 자기 기준이 확실한 사람이라면 그런 말쯤 흘려보낼 수 있다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말이란 것은 힘이 있어서 기쁘다 기쁘다 하면 진짜 기뻐지고, 잘한다 잘한다 하면 진짜 잘해진다.
비상식적이라는 것을 아는 대다수도 계속 듣다보면 익숙해지고 세상은 '혐오'와 '혐오가 아닌 것'으로만 구분 된다.
개인의 판단 기준또한 사회가 쌓아올린 견고한 혐오의 덫을 피하는 것으로 대체 된다.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도 '된장녀' 프레임을 신경써야 하는 사회에서 과연 건강한 자기표현이 가능할까?
결국, 우리의 '극혐'이 용인될 수 있는 대상은 '극혐'을 입버릇 처럼 말하며 개별적 인격을 뭉뚱그려 재단하는 '극혐충'뿐이다.
촘스키를 생각하면, 참크래커가 떠오른다. + 블랙커피도.
나는 '극호' 속에서 살고싶다.
싫고 미운것들에 둘러 쌓여 사는 삶은 궁핍하고 애처롭다. 누구나 애정 속에 사는 사람이 좋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혐오'라는 말로 세상을 등지며 마음의 고립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말'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그게 참 애석 하고 서글펐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흔한 이야기라서 식상한 말로 들릴수 있지만) 말은 마음의 투영인데 말이다.
자. 이제 이 긴긴 글의 끝에 답을 내려야 할때다.
아무 생각없이 '극혐'하던 것들이 그렇게 미치도록 싫었는지.
우리는 누군가를 뾰족하게 겨냥해 경멸하는것이 정말 아무렇지 않은지.
당신이 그 답을 함께 고민해 준다면 이 긴긴 이야기도 '진지충'의 혐오글로 전락하지 않을수 있을것 같다.
나는 말의 주체성이 삶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진심 으로 믿는다.
스스로 말의 주인이 되어 ‘극호’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싶다.
인격의 액자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