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민기 교수의 자살에 네티즌들이 갑론을박한다. 고인이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떠났을 것이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말싸움은 사건에 대한 타인의 태도를 불편해하면서 시작되었다.
- 저지른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받지 않고 저승으로 도망쳤으니 비겁하다.
- 생전의 잘못은 당연히 천벌을 받을 일이지만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 자기 죽음에 대해서가지 책임을 지란 말이냐?
- 이미 죽었는데 뭘 또 굳이...
... 보통은 이런 식이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리고 '의무불이행'에 분노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한 운동가는 이렇게 썼다.
"성폭력 문화에서 가해자의 자살 역시 가해자가 가질 수 있는 특권적 선택지는 아닌가? ... 다시말해 가해자의 자살역시 강간문화를 지속시키는 요소다."
만약 이 말이 옳다고 하면, 조민기는 자살을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남성권력의 꿀물을 빨았으며 파렴치하게도 '강간문화'에 일조했다. 물론 이런 태도는 광기에 가깝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심할 뿐 우리의 감수성에는 이와 비슷한 요소가 있다.
조두순이나 유영철 류의 악마적 범죄자들에 대해 우리는 그가 곱게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안전한 감옥에서 세금으로 콩밥을 먹는 것도 싫고 대한민국이 사실상의 사형제 폐지국인 것도 갑갑하다. 인과응보를 바라는건 인간의 기본적 속성이다. 오랫동안 처벌은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유럽에는 화형이 중국에는 능지처참이 있었으며 참수된 죄인의 머리는 공공장소에 내결려 도시의 미관을 붇돋았다. 특정 개인에 대한 대중의 보복도 보상이다. 거기엔 일정한 만족이 있다.
현대문명은 우리로 하여금 악인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신체를 존중하도록 강제한다. 경찰에 검거된 범죄자의 신체는 구속되지만 안전해지기도 한다. 신체의 생사 역시 당사자에게 귀속된다. 많은 현대 문명국가에서 자살은 원칙적으로 불법성을 띠지만 자살방조자를 처벌할지언정 자살자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위에 인용한 글이 어엿한 진보지식인의 주장이라는 현상은 반문명적이지만, 사실 우리의 본능은 태반이 반문명적이다. 우리에게는 멍석말이의 본능과 측은지심의 유전자가 동시에 있다. 죽음이라는 무게 앞에 생전의 죄가가 어떻든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숙연해지는 것도 인간이고, 악인이 생각보다 빨리 고통에서 탈출한 모습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인간이다. 이렇게 되면 논의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해진다. 싸울 필요가 없거나, 싸우기에는 너무 꼬여 있거나.
과거 MC몽 발치 논란 사건에도 모호함은 있다. 진중권은 대중을 비판했다. 그는 MC몽에 대한 비판은 그 자체로 온당하지만 대중이 MC몽 규탄에 집결한 과열현상은 그것대로 건전하지 못하다고 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한 연예인에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이 1만 명이면 자연스러워서 괜찮고, 100만명이면 과해서 나쁘다는 것인가. 그러면 분노는 선착순이어야 한다. 한심한 99%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전국민이 분노하는 현상이 아무리 불온하다 한들 개개인은 '그 자체로 온당한 비판'을 할 권리가 있잖은가? 타인의 숫자와 상관없이 나는 내 생각을 가질 권리가 있다. 진중권의 평은 가능한 답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답이 아니다.
김보름의 팀추월 사건도 마찬가지다. 특정 운동선수를 끝장내기 위해 60만 명이 넘는 국민이 청원을 한 일은 현상으로서는 기이할 수 있다. 하지만 개개인은 자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 경기는 분명히 국제적인 망신이었고 노선영 선수에게 폭력적이었다.
김보름이 은메달을 따자 신문기사의 논조는 물론이고 국민감정도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의문은 이어진다. 성적을 내면 부도덕해도 되는가? 거꾸로 부도덕함이 의심되면 성적을 낼 기회도 박탈되어야 하는가?
오답은 많지만 정답은 희소하다. 노선영 왕따시키기가 항간의 소문대로 빙상연맹 차원의 기획이었다면 김보름의 입장에서 '어른'들의 의지를 거스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원칙대로라면 그녀는 법정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난 '어른'이다. 시켜서 그랬다고 넘어갈 나이와 경력이 아니다. 그러니 비판도 온당하다.
김보름에게 호의적인 여론은 그녀의 숨겨진 선행을 발굴해냈다. 그러나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애먼 사람을 괴롭힐 권리가 생기진 않는다. 이제는 노선영 선수가 했다는 거짓말(처럼 보이는 카톡 문자) 이미지가 유통된다. 노선영이 코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한들 김보름에게 그녀를 망신 줄 권리가 생기진 않는다.
이슈의 본질은 대체로 고구마다. 목막힘을 참고 천천히 씹고 삼켜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팔리는 식품은 사이다다. 시원하니 좋잖아. 선악을 물과 기름처럼 나누고 우리편과 나쁜편을 나누는 사고는진실과 상관없이 매혹적이다. 명쾌하고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김보름 - 노선영 담론은 누가 선량한 피해자이고 누가 나쁜 년인지 판가름하는 게임이 되었다. 조민기에 대해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을 도마 위에 올리지 말자고 하는 동시에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도 세상엔 많다. 물론 그 역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우리편과 나쁜편으로 세상을 나누는 자들의 구분법을 통과할 수 없다. 자살자에게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건 아니라고 한 이유만으로 '강간문화'의 옹호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 이 역시 역도 참이다. 조민기에게 아직 분이 안 풀렸다고 곧바로 남성혐오자는 아니다.
비슷한 이유로 안희정을 폭로한 김지은이 TV에 나온 모습마냥 순둥이냐, 아니면 사실 '날라리'냐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김보름과 노선영을 두고 양자택일을 하려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사이다가 만연하면 복잡한 고리가 풀어지지 않고 수면 아래에 누적될 뿐이다.
한국 사회의 담론법은 언젠가 사이다에 빠져 죽을 지도 모른다. 반대로 귀찮아도 오답을 피해가다보면 정답 근처를 배회할 수 있겠지. 확실한 오답이 하나 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다.